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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52
창세기 18:16-33
의인 열 명
성경의 여러 본문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은 많다. 그 의문들 또한 해결되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인가를 숙고해 봐야 한다. 성경을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본다는 것은 자기 구원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이다. 한마디로 궁금증이 해결되는 답이 없으면 내가 천국에 못 가는 것인가 하는 의문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읽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드러내는 말씀이 나를 해체하고 해체된 것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으로 주신 이유이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열 명을 제안하든지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왜 50명에서 점차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인가?
또한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 말씀을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본받아 오늘날 우리가 가족과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생각하는 것이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인가? 물론 아브라함의 중보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열 명이라는 의인이 구원을 얻는 결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끝을 보면 의인 열 명을 찾아서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면했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사안들이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6-17절). “나가니라”라는 말의 ‘할라크’는 하나님께서 므두셀라(5:22), 노아(5:24, 6:9)와 “동행”하였다는 그 표현으로 ‘가다, 오다, 함께 걷다’라는 뜻이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뜻이 같은 상태로 비밀을 공유하는 관계이다.
아모스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라고 말씀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선지자의 역할을 하는 자였다. 그래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라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자면 단순히 사람을 전송하러 나간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문맥을 통해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그들과 함께 그들의 일에 참여된 상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에 언약에 동참시키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하려는 것”(히, ‘아사’)이란 하나님께서 ‘이루는 것,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대하에 보면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아하브)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대하 20:7)라고 하였는데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아하브)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라고 같은 단어를 이사야서에서는 ‘벗’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필로스)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라고 말씀한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벗, 친구란 비밀을 공유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3-15)
결국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친구란 비밀을 공유하는 관계이고 그 비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함께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언약 안, 즉 오실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단순히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하였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가족이나 친구, 가까운 이웃의 구원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교훈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8-19절)라고 말씀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의 이스라엘은 결코 강대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강대한 나라가 되고”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나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천하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부르심을 받는 것이 “복”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롯의 구원에 대한 문제가 아니며, 또한 롯의 구원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말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라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보여주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목적 때문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를 통해 궁극적인 언약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함인 것이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아브라함을 지칭하는 “그”라는 말이 없고, “권속”이라는 말의 ‘바이트 아하르’는 ‘다음에 올 집, 후에 올 집’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과 후에 올 집’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이루실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집인 성전으로 이루어 주시는 복을 말씀한 것이다.
“도”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데레크’는 ‘길, 여정, 여행, 양식’이라는 뜻이고, “지켜”라는 말은 ‘샤마르’로 ‘보존하다, 준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이다. “의”는 ‘의로움, 공의, 의로운 행위’이고, “공도”란 ‘미쉬파트’인데 ‘심판, 재판, 공의, 법령’이라는 뜻이며, “택하였나니”라는 말은 ‘야다’로 ‘알다, 인정하다’라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의와 심판을 마음에 품는 것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집을 이루려고 아브라함만 알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만 알았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 되어 그에게 말씀을 마음에 품게 하는 것으로 말씀을 이루시겠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것을 신약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7-11)
“실상”이란 헬라어 ‘알레데이아’는 ‘진리’라는 말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게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보게 되고 하나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0-21절).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 베드로후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6-8)
7절에서 “무법한”이라는 말의 ‘아데스모스’는 부정접두사 ‘아’와 ‘법, 습관’이라는 단어 ‘데스모스’의 합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8절에서 “불법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말씀하였다. “불법”이란 ‘아노모스’란 부정접두사 ‘아’와 ‘율법’이라는 ‘노모스’의 합성어이다. 즉 불법한 것은 율법이 아닌 상태, 율법을 무시한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한 행실”이란 율법의 본질을 모르고 행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자기들의 종교성으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율법적 행위로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모습이었고, 성전의 상태였다.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해온 아브라함의 모습이고 곧 롯의 모습이다.
아브라함의 호소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5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근거한 호소이다. “의인 오십 명”이란 표현은 소돔 성 전체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의인이라고 본 것이다. 숫자 ‘5’는 율법의 수이다. 율법적 행위의 입장에서 의인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이다(시 14:1, 롬 3:10-12). 선악의 관점에서 자기 위주의 의인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말씀한 것은 하나님 얼굴 앞에 마주 대하여 서 있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모형으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 자신을 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27절). 아브라함은 갑자기 돌변하여 숫자를 줄인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라고 표현하여 자기 자신을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50 → 45 → 40 → 30 → 20 → 10으로 줄였다. 결국 아브라함이 의인의 수를 줄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열’이라는 완전한 의를 설명하고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신 것이다. 인간의 자기 행위라는 것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부르짖는 종교성과 대비하여 말이다. 결국 하나님은 언약에 의해 완전한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 심판에서 생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런 과정을 거치신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33절). “말씀을 마치시고”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칼라’는 ‘완성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실 계시의 말씀이 온전히 다 드러났다는 것이다. 우리 성경에 “여호와께서 … 가시니”라고 하였고, 또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헤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나 “가시니”라는 ‘얄라크’는 ‘함께 동행하다’라는 뜻이다. “자기 곳”이란 ‘마콤’은 ‘설 자리’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의미이며, “돌아갔더라”라는 말의 ‘슈브’는 ‘돌아오다, 회복되다’라는 뜻이다. 즉 여섯 번의 간구로 율법적 행위로 의인을 찾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동행으로 언약의 말씀 안에 회복되어 일곱으로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2023091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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