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적 25 _나병환자 열 명을 고치심
누가복음 17:11-19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
강론을 준비하면서 본문에 대해 인터넷에 좀 찾아 보았는데 많은 설교들이 감사절에 한 것이고, ‘감사와 믿음’, ‘감사가 믿음이다’, 또는 ‘감사와 구원’ 이런 제목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감사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는가? 감사하면 믿음이 있다는 것이고 구원 받는가? 다른 분들의 설교를 무조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맞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믿음을 둘로 나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을 받은 우리가 자라게 하는 믿음이 있다고 본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시점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가? 첫 번째 믿음에서인가? 두 번째 믿음에서인가? 아니면 두 믿음이 더해져야 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에 의해 구원 받는다면 그 다음 믿음은 필요 없지 않는가? 받은 믿음으로 나태해지니까 믿음을 북돋우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두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그렇게 둘로 나누어서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하였을 때 그 의미는 내가 나의 의지로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엡 2:8).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롬 3:22, 갈 2:16,20). 결국 오늘날 교회들이 십자가 간판을 걸고 성경을 펴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만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복음으로 전하는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19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나병환자의 믿음이라고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이적을 통해 보여주고 말씀하시고자 한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적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문맥 속에 본문이 위치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16장에서 예수님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16:14)을 빗대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16:19-31).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하나 실제는 재물을 섬기는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16:15).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17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사도들을 향해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17장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1-10절)과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신 이적(11-19절)이 연결된 본문이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인간이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실족하게 하였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죄악인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마음과는 반대로 항상 죄인임을 인식하고 자신이 율법을 가지고 죄를 이겨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란 율법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도 허물과 잘못이 항상 있다는 것을 아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래서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4절)라고 하셨다. 7이란 완전수를 사용하여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가 끝없이 용서하는 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용서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사도들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한다.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 사도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들의 의도가 드러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라고 하셨다. “겨자씨”란 씨 중에서도 아주 작다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도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과 믿음이 있다면 무엇인가 행하려는 의도를 폭로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란 무엇인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더러 바다에 심기우라 하여도 된다고 하신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불가능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결코 뽕나무가 바다에 심어서 제대로 자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선언하면 된다는 것은 말씀이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가능하다는 점에서 믿음이란 ‘말씀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 자체를 ‘믿음’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그것을 실제적으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통해 믿음이 어떤 상태로 나타나는 것인지를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1-13절). 율법에서 나병환자에 대한 규례를 보면 나병환자는 진 밖으로 쫓아내도록 되어 있다. 진 밖으로 보낼 때 그리고 나아서 다시 진 안으로 들어올 때 그 확인과 진단을 제사장이 한다(레 13-14장). 제사장은 진단을 할 뿐이지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나병은 인간이 고칠 수 없는 죄를 상징하고 보여준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라고 한 위치와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친 것을 보면 아마도 나병환자들이 집단적으로 거하는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2절). 멀리서 소리를 높여 말했다는 것은 자신들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부정한 자와 접촉되더라도 결코 부정해질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고 그저 병을 잘 고치는 분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을에 들어가셨다. “들어가시니”(헬, 에이셀코마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보’의 역어로 쓰이는 단어이다. 즉 예수님은 죄인들과 하나되기를 원하셨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절).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직역하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 자신을 입증하라’라는 말이다. 나병에서 나았음을 제사장들에게 가서 진단을 받아야 했다. 아홉 명은 그대로 갔는지 모르지만 한 사람은 다시 예수님께 돌아온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5-16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물음은 그 나병환자에게 답변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이방인만 예수님께 다시 왔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본문은 아홉 명과 한 사람을 대조한다. 열 명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왔고, 열 명이 거리를 두고 소리를 높여 치료를 원했지만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지만 한 사람만 구원을 받았다.
결국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 자신을 입증하라’라는 말씀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나병이 상징하는 죄를 통해 인간이 질병의 고통 속에 있는 것이 죄의 권세 아래 다스림을 받는 상태이고 거기서 나음을 입고 깨끗함을 얻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이다. 죄에서 벗어나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율법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 아홉은 율법의 다스림 아래에 있었으나 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께 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는 말씀으로 고치셨다는 것은 제사장들의 희생 제사 역할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기를 원하셨다.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예수님이 진정한 제사장으로서 희생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음을 입는다는 것을 사마리아 사람이 알았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알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발생된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고(15절) 예수님도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선언하셨다(18절).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자신의 십자가이다. 즉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통해 죄에서 깨끗하게 되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율법에 속한 제사장들은 병을 확인하고 진단하는 것에 그치지만 예수님은 병을 짊이지심으로 친히 대속을 이루시는 진짜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이다(20-37절). 이런 점에서 이 이적 역시 십자가를 보여주는 표적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2)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라고 선포하셨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말씀은 단순히 나병환자가 다시 돌아와서 감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그의 믿음으로 보시고 그래서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나병환자가 멀리서 예수님을 불렀고 고침을 받은 후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실제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찾아오신 것이고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한 사람의 나병환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셔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출애굽 때에 열 재앙 안에 어린 양의 죽음이 있었듯이 열이라는 진리 안에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진리로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네 믿음”이란 나병환자의 믿음이 아니라 ‘네게 주어진 믿음’에 의해서 구원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실로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믿음으로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6절)라고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율법 아래 매인 유대인이 아닌 바다로 상징된 이방인들에게 믿음이 심겨지고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이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 역시 오직 십자가 은혜에 의해 믿음을 선물로 받아 구원이 이루어졌기에 무엇을 하더라도 “무익한 종”(9절)이라고 고백할 뿐이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2022092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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