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적 23 _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심
마태복음 8:14-17
담당하시고 짊어지셨도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음을 밝히셨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이적을 행하신 것을 마태는 집중적으로 기록하여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으나 마태가 나병환자,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적에 이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적을 특별히 선별하여 전말을 소개한 것은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내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십자가를 보여주는 표적이고 사도들은 이 표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증거한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 16:20)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행 2:22)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이런 점에서 앞의 두 이적에는 중요하고 깊은 내용을 전해 준다. 나병환자는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지만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자이나 이방인은 이러한 은혜와 상관없는 상태에 있는 자였다. 나병환자는 인간의 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병을 가진 존재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부정한 자로 쫓겨난 자였고, 백부장은 이방인으로 태어나 태생적으로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자였다. 이처럼 한 사람은 문둥병에 의하여 다른 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정한 존재로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와는 관계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믿음으로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 안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는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적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증거한다. 특히 백부장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장차 많은 이방인이 천국을 유업으로 얻게 될 일의 전조와 시작이 되었으므로 동 서로부터 많은 이방인이 와서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셨다(마 9:11).
그렇다면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고치신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 이적을 기록하고 있는 병행 본문은 마가복음 1:29-34, 누가복음 4:38-41인데 마가와 누가는 이 날이 안식일임을 밝히고 있으나 마태는 안식일과의 연관성을 표현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14절)라고 마태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소개하나 누가는 “시몬의 집”(눅 4:38)이라고 하였고, 마가는 “시몬과 안드레의 집”(막 1:29)이라고 밝힌다.
베드로는 벳새다 출신이지만(요 1:44) 이 당시에는 가버나움으로 이주한 것 같다. “시몬”이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이름인데 마가와 누가가 옛 이름을 썼다는 것은 장모와의 관계를 육신적인 관계로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베드로의 집에서 형제 안드레와 그의 장모도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볼 때 상당한 규모의 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사역의 근거지로 사용하셨을 것이다(참고 마 9:28, 13:1,36, 막 2:1 등).
“열병”이란 헬라어로 ‘퓌렛소’라는 말인데 ‘퓌르’(불)에서 유래한 단어로 ‘불타다, 열병을 앓는다’라는 뜻이다. 즉 불과 연관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 열병에 대해 딱 두 곳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레 26:16)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신 28:22)
장모의 열병은 단순히 병에 걸려 육신적으로 힘든 상태라고 표현한 정도가 아니라 재앙으로 인해 저주 아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자는 인명 수에 산정하지 않는 존재였다. 이런 점에서 철저히 저주 아래 버려져 있고 외면된 상태에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성경은 이런 것으로 죄의 권세에 매여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를 폭로한다.
또한 “앓아누운”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베블레메넨’(원형 : ‘발로’)이라는 말인데 8:6에서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누웠다’라고 할 때 쓰인 같은 단어이다. 마태복음 3:10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할 때 “던져지리라”라는 표현이다. 즉 ‘질병에 내던져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누워서 무능하여 쓸모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래서 의사 누가는 “중한 열병”이라고 표현하였다(눅 4:38).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자를 일어나게 하시고 움직여 일하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 저주 아래 있는 자를 산 자의 상태로 만드셨다. 열병을 고쳐 산 자의 상태로 만드신 방법을 마가는 “그(녀)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막 1:31)라고 하였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열병을 꾸짖으신대”(눅 4:39)라고 표현하였다. 누가는 아마도 질병의 원인이 마귀가 죄의 권세로 다스리고 있음에 대한 문제로 보고 꾸짖으셨다고 표현한 것 같고, 마가는 헬라어 ‘크라테오’(강력하게 붙잡다)라는 말과 ‘에게이로’(죽은 자를 일으키다)를 써서 ‘강력하게 붙잡아 다시 살려 일으키신 것’으로 나타내었다.
그러나 마태는 “그(녀)의 손을 만지시니”(15절)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하프토마이’는 단순히 손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현상을 표현하는 말이다. 맹인의 눈을 만지심(마 9:29)과 혈루증 여자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던 것이었다(막 5:30, 눅 8:46).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만지심은 열병으로 완전히 죽은 상태에 있는 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 되는 은혜를 입히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떠나가고”라는 말은 헬라어 ‘아피에미’인데 ‘놓임을 받다, 석방되다’라는 뜻이다. 즉 모든 표적이 의미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죄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 왕국에 합류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께 수종 들었다”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디아코네오’라는 말인데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였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열병의 죽음에서 놓임을 받게 하시니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게 되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이다.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교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셔서 이적을 행하심으로 친히 십자가를 지셔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실 것을 나타내신 표적이다. 이런 점에서 나병환자의 고치심을 통해 깨끗하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며,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심으로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 하는 것임을 나타내셨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으로 죽은 자와 같은 자들을 하나님 왕국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야 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다고 하였다(16절). “저물매”라고 한 말씀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안식일이 지나서 예수님께 왔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마태는 17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고 덧붙인다. 마가와 누가가 인용하지 않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언급하며 예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셨다고 선언한다(마태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와 달리 안식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말씀 성취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성경 각주에 보면 인용된 말씀이 이사야 53:4이라고 되어 있지만 넓게 53:4-6의 말씀을 보자.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복음서 기록자들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묘사할 때 함께 사용했던 독특한 단어가 “불쌍히 여기사”(마 14:14, 20:34, 막 1:41, 6:34, 눅 7:13 등)라는 말인데 이 말은 내장이 뒤틀릴 때 오는 고통,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죄의 권세에 매여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한 고통을 느끼시며 긍휼을 베풀고자 하셨다.
인용된 이사야 53:4의 말씀은 이사야 53장 메시아의 대속에 관한 문맥 속에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은 단순히 질병을 고치신다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메시아의 대속에 대한 말씀이다. 따라서 마태가 본문에서 전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약자로서 설움을 당하는 것을 담당하시며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셔서 세상의 고통에서 건져내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실 것에 대한 말씀이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냄으로 자기 백성들의 연약함을 돌보신다.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 그 이름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이란 죄의 권세에 매인 상태를 말한다. 질병, 연약함으로 죄를 설명한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와 같이 열병으로 누워 전혀 무력하고 쓸모없는 자가 바로 우리이다. 율법적인 행위로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생명을 온전하게 드러내셨고 그 생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말씀 성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대신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 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대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병 고침이 목적이 아니라 말씀 성취가 목적이고 그 말씀 안에 생명으로 거하게 하시는 은혜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2022091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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