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24. 요한복음 4:46-54 네 아들이 살아 있다_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불편한 진리 2022. 9. 21. 14:56

https://youtu.be/RrwsYUO-3yg

 

예수님의 이적 24 _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요한복음 4:46-54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이적과 본문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이적’과 같은 것으로 보는 성경학자들도 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많은 이적이기에 우리는 같은 것이다 혹은 다른 것이다 라는 결론을 가지기보다 각각의 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본 이적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것으로 요한복음의 특성상 표적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이 표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본문이 어떤 문맥 속에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4:4에 보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표현하였는데 헬라어 ‘데이’는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뜻이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대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해서 이동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반드시 거쳐서 가시겠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반드시 가셔야 하고 거기서 나타내실 계시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서 생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자에게 “내 말을 믿으라”(4:21)라고 하셨고, 여자에 의해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4:39)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틀을 더 거하시면서 말씀을 나타내시니 “믿는 자가 더욱 많아”(4:41)라고 밝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4:34)라고 말씀하셨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43절)라고 하였다. 4:3에서 유대를 “떠나사”라고 할 때는 ‘아피에미’(내버려 두다, 내보내다, 포기하다)를 쓰고 있다. 즉 유대를 버리고 사마리아 쪽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43절에서 “떠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엑셀코마이’로 쓰고 있는데 단순히 사마리아를 나가셨다는 의미로만 쓰고 있다. 요한 사도에게 있어서 “유대” 혹은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사마리아 여자, 왕의 신하를 등장시켜 유대인들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이 표적을 소개한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46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갈릴리 가나로 다시 오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의 신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가버나움에서 가나에까지 예수님을 찾아왔다. 찾아온 근거를 성경은 이렇게 밝힌다.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신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45절에 의하면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라고 하였다. 즉 예수님께서 고향 갈릴리에서 환영을 받는 것은 명절에 유대에서 행하신 많은 표적을 본 까닭이라는 것이다(참고 2:23). 그래서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할 때 쓴 ‘람바노’라는 단어와는 달리 여기서는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라는 뜻의 ‘데코마이’를 쓰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으나 예수님을 그저 자기 자존심을 세워주고 사업이나 자식들을 잘 되게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주기 위해 때마다 철마다 심방하여 가정과 사업이 잘 되도록 빌어주고, 목사의 안수기도가 필요하면 서슴없이 행하고, 입시기도회를 열어 한껏 축복을 빌어준다. 그래서 그 결과가 좋으면 마치 교회가 큰 성과를 낸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은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이 모든 것들은 복음과 상관이 없으며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아니다.

왕의 신하도 이 소식을 듣고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예수님을 찾았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절)라는 왕의 신하의 요청에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라고 말씀하신다.

흔히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에 대해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의 거리는 30-40km가 되는데 이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고, “청하되”라는 표현이 헬라어로 반복적 동작을 말하는 미완료시제임으로 왕의 신하는 계속, 간청한 믿음이었고 한다. 또한 왕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유명하다고 할 수 없는 목수요 시골 동네의 선지자라고 하는 자를 찾아왔다는 것은 자기 자존심을 다 내려놓은 것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이것이 믿음인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믿음은 아니다.

그러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우리는 쉽게 표적과 기사를 봐야 믿는 믿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면 거꾸로 말해서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면 사람들이 믿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서 표적과 기사를 본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표적과 기사에 의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4:41-42에서 ‘여자의 말’로 인함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으로 믿는 자가 많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자면 왕의 신하가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그의 대단한 믿음에 의해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왕의 신하와 또한 아들까지도 그들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다. 인간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말씀이 한 것이다. 보지 못하면 믿지 않고 본다고 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죄인들의 눈이다. 이것을 성경은 악한 세대라고 말씀한다. 악한 세대의 죄를 고발하고 생명을 드러내시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그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절)라고 밝히고 있다. 문자 그대로 왕의 신하가 말씀을 믿고 갔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드신 그 능력에 의해 믿고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다. 환언하면 왕의 신하와 아들이 고침을 받는 것에는 연관성이 없다. 왕의 신하가 무엇을 믿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를 등장시켜 ‘말씀과 믿음의 관계’를 나타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믿음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놓고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편에서 원하신 것을 어떻게 드러내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실상으로 드러내셨다. 즉 이 땅은 다 허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로 나타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고 그 말씀의 증거로 제시하신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나 죄인의 한계는 죽음이라는 것에 있다. 그래서 왕의 신하는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라고 말한다. 왕의 신하는 “죽기 전에”라는 죽음의 한계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오셔서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여기서 ‘죽음’에 대한 표현을 헬라어로 ‘아포드네스코’로 쓰고 있는데 ‘아포’(~으로부터)와 ‘드네스코’(죽다)의 합성어로 ‘~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적으로 죽는 죽음’을 의미한다(참고 딤전 5:6).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절)라고 말씀하셨고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50b-51절)이라고 기록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이 나았다’ 혹은 ‘내가 그 병을 고쳐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셨다. 병에서 나아 이제 살아났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상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왕의 신하는 아들이 죽어가는 것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시점을 확인하고 믿고자 한다.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2-53절). 요한복음은 영적으로 그 본질적 의미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기록하였다. 공관복음에서는 ‘이적’, ‘기사’로 표현하나 요한 사도는 철저히 “표적”이라고 쓴다. 그렇다면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를 “일곱 시”라고 한 것은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53절)라고 하였다. 두 번째 표적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은 첫 번째 표적과 연관성이 있는 메시지를 나타내고 싶은 의도가 담겨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의도적으로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46절)라고 밝혔다. 그래서 첫 번째 표적을 “사흘째 되던 날”(2:1)이라 하였고 4:43에서도 “이틀이 지나매”, 즉 ‘사흘째’ 되던 날이다. 즉 첫 번째 표적과 같은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다. 언약의 완성이라는 ‘칠’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루실 ‘삼일’을 나타내고 있다.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2:11)라고 하였다. 즉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내셨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서 천국 잔치가 회복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두 번째 표적을 통해서도 첫 번째 표적과 함께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사람들은 보아야 믿는다 하고 눈 앞에 실상으로 드러나야 확신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요한복음을 철저히 폭로한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은 7개의 중요한 표적으로 설명한다.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1),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4:46-54),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5:1-9), ‘5,000명을 먹이신 표적’(6:1-15), ‘물 위를 걸으신 표적’(6:16-21), ‘나면서 맹인 된 자를 고치신 표적’(9:1-12),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4)으로 결국 최종적인 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7개의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9:5),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14), ‘부활, 생명’(11:25), ‘길, 진리, 생명’(14:6), ‘참 포도나무’(15:1)라고 밝히신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에 의한 믿음을 이루셨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믿음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씀과 믿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밝혀준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9-17)

 

(202209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24.요0446-54 네 아들이 살아 있다_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2022092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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