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26. 누가복음 4:31-37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_회당에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

불편한 진리 2022. 10. 5. 13:41

https://youtu.be/K0MJJCrxy8w

 

예수님의 이적 26 _회당에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

 

누가복음 4:31-37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성경 전체를 하나의 큰 그림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본문에 대한 해석이란 작은 그림 하나하나를 통해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고 또한 전체를 통해서도 부분 부분의 그림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의 어떤 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 본문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본문 하나에 매여버리기 쉽다. 본문 한 곳에만 매여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깝게는 본문의 전후 문맥, 한 책, 폭넓게는 성경 전체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를 따라가야 한다.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대한 그림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 조각 조각들이 연결된 모자이크 조각들을 설명함으로 그것이 전체 그림에서 어떤 부분인지를 이해하고 전체 그림과 어떻게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떤 본문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되어야 하고 또한 전체 그림에 맞는 해석이어야 한다. 누가복음 또는 예수님의 비유나 이적이라는 작은 그림을 통해서도 전체 그림을 또한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본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서 고치신 이적으로 마가복음 1:21-28에도 기록되었다. 마가는 마가대로 이적을 설명하는 의도가 있고 누가는 누가대로 이적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표현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뿐이다. 우리는 누가의 문맥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께 이끌려 시험을 받으신 후 곧장 갈릴리로 가셨다고 기록하였다. 13절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라고 한 후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4:14-15)라고 하였다. 그리고 16절에서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라고 말씀한다.

성령의 능력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자주 성경을 읽으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 61:1-3)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라고 선언하셨다. 즉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라고 하였고,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28-29)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한 예수님을 보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31절에 보면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라고 하였다. 마가의 본문에 보면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1:21)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사렛 회당에서 있었던 일과 같은 안식일인지 다른 안식일인지 모르겠지만 누가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있었던 이적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즉 이 이적이 우발적으로 어떤 날에 있어ㄸ너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이적을 행하셨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르치신 것과 연결하여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나타내신 것을 첫 이적으로 기록하였다.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1:22)라고 하였지만 누가는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32)라고 하여 예수님의 권위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하여 누가는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33-34)라고 상황을 전한다. 마가는 마침”(1:23)이라는 말로 말씀을 가르치신 것과 이적을 나타내신 것이 무관하지 않음을 표현하였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35)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에게 귀신을 꾸짖어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심으로 고치셨다. 꾸짖어쫓아내셨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성경에 누가나 마가나 동일하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직역하자면 누가는 더러운 귀신(악령)이 소유한 사람이라는 말이고, 마가는 더러운 영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귀신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그런 귀신의 개념이 아니다. “더러운 영”(, ‘프뉴마 아카달토스혹은 프뉴마 다이모니온 아카달토스’)이란 표현은 성령’(, ‘프뉴마 하기오스’)과 대조하여 표현된 것이다.

회당에 어떻게 귀신 들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유대인들의 회당은 예배하고 기도하며 종교적인 모임이 있는 곳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평소에 아는 것처럼 귀신 들린 자가 소리를 지르고 안식일에 회당 모임을 훼방하거나 하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귀신 들린 사람은 평소에 귀신 들린 상태가 조용하여 잘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귀신 들린 자가 우리라고 하였는데 성경은 이 귀신 들린 자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귀신 들린 자라는 의미로 귀신 들린 자의 말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을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4)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단순히 고향 갈릴리의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에서 환영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은 이 땅을 자기 고향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한 것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3-6)

 

마귀는 이 땅을 자기 것으로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없는 영광을 예수님께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즉 마귀는 이 땅을 자기 고향으로 삼고 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가버나움과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아는 고향 사람이라고 해서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을 고향으로 삼고 있는 마귀의 권세에 붙잡혀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 고향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거부한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은 이미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에 승리하신 전리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말씀의 권세로 더 분명하게 나타내신 것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다. 평소에 사람들이 알 수 없었던 귀신 들림의 상태,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상태가 말씀의 권세에 의해 그 실체가 폭로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귀신 들린 자가 말했다. 즉 거룩하신 분께서 우리는 멸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고 또한 회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잘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항변이었다. 회당이라는 곳에서 온갖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마귀의 권세 아래에서, 더러운 영 안에서 더러운 영에 소유가 되어 행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희년의 성취자가 되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며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완성자가 되시는 분임을 안식일에 이적 행하심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를 이적(행동)으로 드러내셔서 복음을 하나님 나라로 드러내셨다. 전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43)라고 하셨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 이적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죽음으로 은혜의 해(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을 나타내신 표적이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 권세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는 죽음 그것이 말씀의 권세이다. 누가는 이점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32절에서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라고 하여 가르치시는 것에 대한 말씀의 권세를 강조하였고 또 이적을 나타내신 이후에도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36)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가르치시는 것을 통해 드러난 권세나 이적을 통해 나타난 권세가 같은 말씀의 권세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에서도 이렇게 선포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의 권세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귀신이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귀신을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말씀에 굴복되지 않는 지식적인 차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은 믿음과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 대하여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식으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남을 공격하고 찌르는 칼이 될 뿐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주신 믿음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붙잡힌 바 되어 날마다 죽은 자로 드러날 뿐이기 때문이다.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3-47)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속하여 거짓, 즉 비진리를 말하는 자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여기서 하나님께 속한 자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만 말씀의 능력에 의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이런 은혜가 없다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이 회당에서 종교 행위에 매여 율법을 좇는 자에 불과한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더러운 영 안에 있는 자들이고 더러운 귀신의 소유에 불과한 자들이다. 그래서 이 땅을 영원한 우리의 고향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밀쳐내고 죽이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가 말씀을 나눈다는 것은 오늘도 마귀의 권세 안에 있는 자들을 말씀의 권세로 빼내어 하나님께 속한 자로 만드시는 십자가의 은혜이다(202210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