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이적 21_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심
마태복음 8:5-13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단지 말로 훌륭한 교훈을 주신 것만으로 끝내신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심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말씀에 의해 죄에서 깨끗함을 얻어 영생을 누리는 것임을 친히 보여주시기 위해 나병환자를 고치셨다. 그러므로 나병환자를 비롯하여 산상수훈 이후에 병자를 고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표적이다. 이런 의도로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에 있었던 이적들을 묶어서 산상수훈 이후에 연결하여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예수님께서 백부장 종의 중풍병을 고치셨다는 내용이다. 이 이적은 마태복음 외에도 누가복음 7:1-10에 기록되었는데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나온 것으로 표현한 마태의 기록과는 달리 누가는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하여 예수님께서 말씀드리도록 하였고 또 예수님께서 직접 오신다는 것을 듣고는 친구를 보내어 집에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된다고 전한 내용을 삽입하고 있다.
같은 내용의 본문이 다르게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성경의 모순을 말하며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이 있는데 결코 모순된 다른 기록이 아니다.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를 대신 보낸 것이나 백부장이 직접 간 것이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대통령의 대변인이 말을 한 것은 대통령이 말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의 일차 독자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백부장을 인정할 만큼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며 회당을 지어준 선행을 베푼 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일차 독자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백부장의 의중을 전달한 유대인 장로에 대한 이야기를 삭제함으로 순수하게 이방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설교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백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면서 우리가 그 믿음을 본받자고 한다. 그 믿음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면서도 이 백부장이 유대인 회당을 지어주었기에 유대인 장로들과 친구에게도 신뢰를 얻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며 또한 종이 병든 것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겸손한 믿음이었다고 칭송하면서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한 개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그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교훈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과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고(롬 1:17)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엡 2:8).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질병을 고치시는 것을 통해 죄에서 놓임 받는 상태, 즉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고자 하시는데 백부장의 믿음을 강조한다면 종이 백부장의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되는데 다른 사람의 믿음에 의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어긋난다. 오히려 백부장에게 주신 믿음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한 태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 주고 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5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우연히 가버나움에 가셨는데 백부장이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통해 나타내실 뜻이 있으셨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찾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들은 언약의 성취자 되시는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일들이다.
백부장이란 쉽게 표현하면 1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에 우리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당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지배자의 위치에서 군사 100명을 지휘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권력을 가진 것이었다. 이때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하는 왕은 로마의 허락을 받은 헤롯 안디바였고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이 백부장이 로마인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백부장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6절)라고 하였는데 식민 지배를 받는 유대인 중에서 예수라는 사람을 찾아와 “주여”(6절)라고 부른 것이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다. 누가는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눅7:2)라고 하였지만 마태는 “중풍병”이라고 밝히고 있다. 중풍병으로 죽게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병이 위중하여 거의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병을 통해 성경은 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의 상태를 나타내 준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라고 하셨다. 누가의 기록에 보면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 주시기를 원했는데 이는 백부장이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었다는 것으로 인해 백부장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좀 더 적극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중일 때 친구를 보내어 오시지 말고 말씀만 하시기를 요구하였다.
이 말씀은 헬라어 문장은 ‘내가 가서 고쳐 주랴?’라는 의문문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백부장이 가진 믿음이 어떤 것에 근거한 것인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8절)라고 하였다. 백부장이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왜 백부장으로 하여금 이런 대답이 나오도록 만드셨는가?
백부장은 “말씀으로만!”(복수가 아닌 단수) 충분히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절)라는 말씀이다. 즉 백부장 자신도 명령을 하면 수하에 움직이는 자들이 있는데 예수님은 말씀만 하심으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말씀의 권세, 즉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보고 있으며 진리의 말씀이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편에 이런 대목이 있는데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17-2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그렇다면 그 말씀이 이 땅에 오심으로 어떤 현상이 드러나는가를 바울 사도가 이렇게 증거한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7-18)
이 말씀은 흔히 말하듯이 믿음이 없는 자는 교회당에 계속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계속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믿음의 출처가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주어지면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듣는다는 것은 들리는 것이고 들리는 것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또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시공간을 초월하여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백부장에게 이미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백부장에게 말씀에 의한 믿음을 주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놀라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10절)라고 하였고 또한 누가복음에서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눅 7:9)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백부장이 대단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백부장에서 믿음을 주셔서 먼저 일해 놓으신 것을 보고 놀라셨다는 뜻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믿음이란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부장의 믿음,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백부장에게 주어진 믿음이란 말씀의 권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우리가 스스로 가지자고 노력한다고 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생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즉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믿음이란 우리 안에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권세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세이다. 그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에 말씀에 복종하는 상태가 되어 “말씀으로만!”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8절에서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라고 표현한 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믿음이 우리 자신을 보게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의 권세 앞에 죄인의 무가치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고백이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주어진 믿음이란 말씀의 권세 앞에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게 하고 보게 하는 것이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개같이 취급하는 이방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로 가서 그들도 내 백성을 삼으시겠다는 의도이다(참고 사 49:6).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언약 안에 들어올 수 있음을 보여주시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거하시게 된 것을 마태는 이미 이방의 빛이 되신다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보았다(마 4:13-16).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1-12절)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는 주께서 선택하신 백성들로 이루어진다.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가 된 이 새로운 백성들이 이스라엘이다. 산상수훈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율법에 의한 자기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정복당한 자가 이스라엘이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3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가라 네게 주어진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라는 선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앞으로 반드시 십자가를 지실 것이고 그 십자가에 의해 믿음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이적 역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표적이다.
중요한 것은 백부장의 종이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 백부장에게 주어진 믿음의 성격과 내용이다. 그러므로 하인의 병이 나았다는 것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증거이다. 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죄이고 거기서 벗어나 고통이 없는 상태가 하나님 나라이다. 그 나라에 속하는 것은 죄인이 율법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지신 십자가로만 가능하다(202207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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