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82강 로마서 16:17-20 발 아래 상하게

불편한 진리 2022. 6. 26. 13:18

 

https://youtu.be/wwiRf0MIdgc

 

❖ 로마서 여든두 번째 강론

 

로마서 16:17-20

발 아래 상하게

 

 

우리는 이제 로마서의 막바지에 와 있다. 오늘 본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마지막을 바울 사도가 어떻게 장식하고 있는지 주목하게 만든다. 사도는 문안 인사를 한 후 서신을 마무리하기 전에 경계의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결코 경고나 경계 정도의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으며, 또한 왜 이 말씀을 단순한 경고나 경계 정도로만 봐서는 안 될까?

17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라고 말씀한다. 바울 사도는 16장에 들어서면서 로마 교회에 서신을 전달하는 뵈뵈를 주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할 것을 말하면서 많은 사람의 이름을 들어 서로 문안하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서로 분리되어 따로따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같이 한 몸이기에 서로 떨어져서 로마에 있고 고린도에 있고 에베소에 있을지라도 같은 하나의 교회로 보고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다. 한 몸이기 때문에 복음을 거슬러 한몸됨을 깨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는 뜻에서 서신의 마지막에 강조한다.

그래서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라고 말씀한다. “살피고”라는 단어는 ‘자세히 관찰하고 주시한다’는 뜻이고, “떠나라”라는 말은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어떤 자들에게서 벗어나라고 하였나?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분쟁”이란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불화, 분열’을 말한다. “너희가 배운 교훈”이란 ‘가르침’을 의미하는데 이제까지 바울 사도가 전한 ‘하나님의 복음’이다. 바울이 사역하던 이 당시에는 유대의 율법주의와 상당히 많이 부딪히고 있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는 말씀이 있다.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 15:1-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교회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유대주의적 뿌리를 둔 사람들이 믿음 이외에 모세 율법과 할례받는 것을 지킬 것을 강요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기에 따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수긍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지 못하여 벌 받고 있었다고 생각해서 이제 회개하는 차원으로 교회에 들어와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구속자이기보다는 여러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대인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속해 있었다. 저들은 예수님 덕분에 본래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던 구원이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허락되었다는 정도로만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이방인들의 구원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참다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런 문제들 때문에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서신으로 복음을 전했다. 율법은 구원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특별히 갈라디아서에서도 명확하게 선포하였다.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4-6)

 

 

율법을 요구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란 결코 인간 편에 자격과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와 구원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까 하는 중립 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죄의 노예로 있던 자들이다. 구원, 의, 선, 거룩, 영광을 알지도 못했고 선택할 능력도 없는 존재가 죄 아래에 있는 인간들이다. 한순간도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그만큼 인간 편에서는 불가능한 심각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인간은 완벽하게 죄 가운데 갇혀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앞부분에서 계속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아니 본문 말씀을 살펴볼 때마다 인간에게는 자랑거리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것을 확인했다. 로마서 본문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하면서 누차 율법과 대조하여 전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3:20-24이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0-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인한 자들에게는 자기 행위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주어졌고 그것이 은혜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자랑거리가 있다. 자기는 남달라서 구원을 받았고,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생각해서 구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에 대해 바울 사도는 한 마디로 이렇게 지적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믿어진 은혜이고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아무런 조건과 자격을 내세울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상태여야 한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간들은 싫어한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거부감을 인간의 공로나 행위를 십자가에 슬며시 포함하는 것으로 믿음을 포장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성취하신 십자가에 인간의 공로, 행위를 추가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18절에서 “(왜냐하면)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은 어떤 자에게 속해 종으로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종으로 속해 있지 않고 자기 배만 채우는 일에 종으로 속해 있다는 것이다. “교활한 말”(헬, 크레스톨로기아)이란 ‘부드러운 말, 다정한 말’이라는 뜻이고, “아첨하는 말”(헬, 율로기아)이란 ‘찬양하는 말, 축복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즉 부드럽고 다정한 말, 축복하는 말로 나타내지만 그것이 복음을 거슬러 한몸됨을 깨뜨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9-20절)라고 선언한다. “순종함”이란 그들에게 말씀이 들려졌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도가 “평강의 하나님”을 언급한 것은 전쟁을 전제한 표현이다. 적당히 타협하여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과 전쟁하여 굴복시켜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다. “상하게 하시리라”(헬, 쉰트리보)라는 말은 ‘산산이 깨뜨리다, 부수다’라는 뜻이다. 문맥적으로 보자면 복음을 거슬러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깨뜨리려는 자를 “사탄”이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아담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나게 한다. 창세기에 이렇게 말씀한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4-15)

 

 

아담이 선악의 나무를 취한 후 저주의 표현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하셨다. 즉 배가 땅에 닿아 흙을 먹는 상태를 저주 아래 있는 땅적 존재로 나타낸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한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자기 배만 위하는 것이 땅의 일이다. 땅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에 스스로 묶여 있다. 자신의 배를 신으로 여기고 우상이 되어 있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담에게는 언약이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뱀의 배후 즉 사탄과 아담 사이를 원수 관계로 만드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서 사탄의 머리를 밟아 깨뜨리고 승리하신다는 약속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왜 미래형으로 표현하였나?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16장 전반부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아직 우리 눈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묵시 속에서는 이미 승리한 완성체의 교회이지만 역사 속에서는 로마 교회가 다른 복음으로 한몸됨을 깨뜨리는 자들에게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주가 되셔서 은혜로 이끄시는 그것이 다른 복음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능력이다.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복음을 이용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을 거슬러 한몸됨을 깨뜨리는 사탄이다. 배를 땅에 붙여 사는 땅적 교회이다. 비록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일지라도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신 은혜로 인정되지 않고 십자가를 거부한다면 사탄이다(마 16:16-23).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산산이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를 둘 곳으로 세우신 것이 교회이다. 그래서 이 땅에 세워지면 영원히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배가 신이 된 가짜 교회를 날마다 거부하고 무너뜨리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진짜 교회를 은혜로 이루신다. 오늘도 우리가 교회로 모였다면 주성교회를 산산이 깨뜨리시고 자기 한 몸만 남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굴복된 고백이 있어야 할 것이다(202206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82.1617-20 발 아래 상하게(202206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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