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83강[끝] 로마서 16:21-27 나의 복음

불편한 진리 2022. 7. 3. 13:08

https://youtu.be/FepUUV3JqmY

 

❖ 로마서 여든세 번째 강론

 

로마서 16:21-27

나의 복음

 

 

로마서 강론을 하면서 신학적인 용어들을 일부 표현하였지만 가능한 자제하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기존에 들었던 신학적 용어들이 실제 복음으로 설명하고 나타내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칭의, 성화, 영화, 예정, 선택 등의 용어들이 신학적으로 정리된 것과 실제 성경이 나타내고자 한 것과는 괴리가 있기에 가능한 본문 말씀에 충실해서 문맥과 성경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전달하고자 하였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첫 구절에서 “하나님의 복음”(1:1)을 말했는데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1:2)으로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16)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1:17)하신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1)라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그래서 출처가 하나님이고 소유가 하나님이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복음”(1:1)이고 “아들의 복음”(1:9)이며 곧 그리스도의 복음”(15:19)이다.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믿음을 삶으로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였다. 어떤 본문이든지 언제나 십자가를 선포했다. 십자가란 단순히 예수님이 죽은 자리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과 함께 죽은 자리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십자가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항상 원수 노릇을 하며 예수님을 죽일 정도로 하나님을 미워했다는 죄의 본성을 드러내는 증거물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정도로 악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냥 관념적으로,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성도란 십자가를 통해 세상 모든 일을 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럴 때 세상이 새롭게 인식된다. 모든 사람이 세상에 희망을 두고 열심히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의 모든 수고와 땀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고발당하는 것이다.

어쩌면 날마다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니 타성에 젖어 무디어 있지 않은가? 그저 복음을 알면 되고 십자가만 붙잡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오늘도 주성교회 강론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강론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면서 적당히 성경해석을 즐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그리고는 내가 행하는 모든 게 다 죄니까 일주일 동안 자신의 목표와 소원대로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고 그 말씀이 날마다 나를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 끌어다 놓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시는 은혜로 확인되는 복음이어야 한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로마서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복음을 거슬러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한다. 결국 그렇게 복음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천국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이해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배를 신으로 섬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간들에게 십자가란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하는 여러 신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죄성을 아는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하나님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였다.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복음의 핵심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몇 사람들을 더 언급한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21-23절)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언급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16장 전반부에 기록된 이름과 같이 구체적으로 다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동역자 디모데”를 소개하고, 본 서신을 바울에게서 받아쓰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라고 인사하고 생각나는 몇 사람을 더 언급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성도들의 의미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는 25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바울 사도가 어떻게 서신의 결론을 맺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5-27절).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로마서 서두에 있는 내용의 반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선지자들의 글”에 대한 언급은 1:2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라는 말씀을 연상되게 한다. 또한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은 1:5에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는 말씀의 반복이며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이라는 말씀은 1:11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과 동일하다.

이렇게 인사말의 주제가 결론에서 그대로 반복하여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나 교인들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바울 자신의 잘남이나 또는 자신이 얼마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도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약속의 말씀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비밀의 계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드러난 복음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이라고 했다. 왜 “나의 복음”이라고 하였나? 로마서 2:16에도 보면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라고 하면서 “나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같은 표현으로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8-13)

 

 

“내가 전한 복음대로”라는 표현은 ‘나의 복음’이라는 말을 의역을 한 것이다. 즉 바울의 복음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11절에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한 말씀에서 ‘나의 복음’의 의미가 잘 드러난다. 한 마디로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아났기 때문이다(참고 롬 6: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신 복음 거기에 바울과 함께 죽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러내고 전하는 입장에서 나의 복음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이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라고 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음이 순종 안에 두시려고’라는 말이다. 또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하였지만 자신의 계획이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을 따라” 된 것이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행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고 수많은 선지자를 희생시키셨다. 그 선지자들처럼 언약의 후손은 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라는 말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다 드러났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는 “모든 민족”이란 말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잘되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돌보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오직 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분을 통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이 땅의 모든 민족이 차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다.

기독교를 순종의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대표적 인물로 들면서 순종할 수 없는 가운데서 순종했다고 한다. 그래서 순종의 절정을 아들을 바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들을 바칠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것을 통해 비밀의 계시를 드러내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복음은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라고 언급하였다.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다. 그러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였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7절)이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에게 그 영광이 그 영원 안으로, 아멘’이다. 여기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말씀한 그 하나님이 아니라 특별한 그 하나님을 지칭한 것으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진정으로 복음을 알게 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은 복음을 알게 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은 죽어 없어져 삭제되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게 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마무리 지으면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한다. 이것이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의 입장이다. 복음은 단순히 공중에 떠다니는 구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은 죽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의 복음이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바울을 사로잡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끝까지 복음만 나타내고 전할 수밖에 없었다. 죄의 권세를 알았고 그 권세에 매인 자신의 죄를 알았기 때문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4-25). 그렇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라고 하면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라고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히 ‘나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202207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83.1621-27 나의 복음(202207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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