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59강 로마서 11:22-24 하나님의 인자와 준엄

불편한 진리 2022. 1. 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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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쉰아홉 번째 강론

로마서 11:22-24

하나님의 인자와 준엄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의문이 많을 수 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고 다윗을 왕으로 세워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로 만드시기까지 일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가? 간단하게 생각해서 이스라엘 편에서 보자면 율법으로 제대로 살았다면 몽땅 구원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나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다면 그 언약에 다 순종하도록 만드시든지 등등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우리가 알기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반역의 연속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 그렇다면 언약,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굳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하셨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 의해 예수님이 살해당하시는 복잡한 역사를 거치게 하셨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철저히 실패하였다는 뜻이다. 율법이 잘못되었거나 하나님의 계획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였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이방인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그들에게 주어질 구원을 이방인에게 주셨다는 주장은 하나님 언약의 본래 취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고 그들을 대체하여 이방인이 구원을 얻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스스로 교만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왜냐하면 뿌리가 가지를 보전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이 뿌리가 아니라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뿌리이시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뿌리의 기름짐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스스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접붙이신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결코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를 우리가 계속 상고하면서 확인했듯이 “하나님의 복음”(1:1)을 말씀하고, 그 하나님의 복음에 의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3:22)으로 주어진다(참고 갈 2:16, 3:22, 빌 3:9, 엡 3:12).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2-24)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이 없는 죄인인데 누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죄인들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결국 누군가 믿음을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온전한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완성하셨기에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실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의에 참여될 수 있다는 것은 내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바울 사도는 6장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라는 가상 질문을 하였다. 구원을 은혜로 베푸셨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이라면 더 많이 범죄하여 그 속에서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죄인들의 생각이다. 이런 논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방인이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죄를 안 지으면 은혜를 모르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실패하지 않았으면 이방인이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러나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을 장악하고 계시기에 날마다 자기 죄가 크게 보임과 동시에 십자가의 은혜가 늘 기억이 되는데 죄를 더 짓자는 식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은혜란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우리를 더러운 곳에서 꺼낸 것인데 그 은혜를 받기 위해 더러운 곳으로 간다는 것은 모순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막살자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을 구원한 것이 아니며 역으로 이방인의 구원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나게 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구원은 우리의 소관이 된다. 또한 하나님은 상대방을 세워놓고 질투를 유발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믿음’에 관한 문제라고 선언하였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었고 이방인은 믿음이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의에 합류되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인간은 죄인으로 믿음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러면 이방인이 어떻게 믿음 가운데 세워질 수 있었는가?

그것을 22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그러나)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라고 밝혀준다.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가 아니면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누구든 찍혀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인자”란 ‘자비, 친절’이라는 뜻이고 “준엄”(헬, 아포토미아=‘잘라내다’라는 말에서 온 단어)이란 ‘엄격, 위엄’이란 뜻인데 “인자”는 15절에서 말씀한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되고 “준엄”은 “버리는 것”과 관련된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인자”에 의해 접붙이시는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준엄”하심에 의해 잘라 내시는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접속사 ‘그러나’(헬, 데)가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인자 안에 들어왔다면 그 인자에 의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머물러 있으면”이라는 말은 계속 머물러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나’라는 반전 접속사로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면 넘어지는 멸망의 상태요 찍히는 바 된(베어 버림을 당하거나 잘라내 버린) 상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23절)라고 하였는데 개정성경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었다. 직역하면 ‘그들도 만약 불신앙에 계속 머무르지 않는다면 접붙임을 받으리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믿는 것이나 혹은 믿지 않는 불신앙이 하나님께서 접붙이시는 근거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상태,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시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접붙이시는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24절)라고 말씀한다. 야생 올리브나무를 접붙이시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올리브나무를 본래의 올리브나무에 다시 접붙이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문제이지 이스라엘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본래의 나무에 붙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접붙이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그러므로 구원, 하나님의 의에 참여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린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접붙이시는 능력에 달린 하나님의 행위이다. 실패한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하나님이라면 또한 이방인이라고 해서 버리지 못하실 이유는 없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절). 때문에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자를 베푸신 그것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자기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뿌리이시고 근원이신 예수님께 접붙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드러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내 구원, 나의 미래에 대하여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로 볼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분명히 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잘라 내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접붙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나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뿌리의 기름짐에 참여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안에서 완성된 자기 백성들이고 그들이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성도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해 안달 나신 분이 아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식을 적용해서 어쨌든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해 놓고 십자가에 의한 은혜의 구원을 태초부터 고수해 오셨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죄인의 마음은 조석이 다르고 변하기에 우리의 감정은 믿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란 의미 없다. 그러나 언제나 변하지 않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인자와 준엄의 하나님이라는 것 때문에 내 구원에 대해 불안해 하면서 혹시 나도 버림을 받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근원이시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이신 은혜를 말씀 안에서 늘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화두는 “다음 세대”인 것으로 보인다. 교회들은 다음 세대를 책임지기 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교인 수가 확연히 줄고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이 장기화 되면서 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미래에 교회가 텅텅 비는 악재를 막아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일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구원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우리 자리를 넓히고 나의 안전망인 교회가 망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이어가며 확장하기 위한 탐심을 “다음 세대”라는 말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3-34)라고 하셨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채워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너희”란 이미 산상수훈 초반에서 말씀하신 천국의 복 안에 있는 자이다. 천국의 복 안에서 계속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상태에 있다면 그 내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일이 염려하는 것이지 내가 염려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인간이 미래를 대비할 수 없고 다음 세대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자기 일, 자기 계획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있다는 의미이다. 그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은혜만 주어질 뿐이다(202201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59.1122-24 하나님의 인자와 준엄(2022010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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