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61강 로마서 11:33-36 하나님의 영광

불편한 진리 2022. 1. 1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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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예순한 번째 강론

로마서 11:33-36

하나님의 영광

고린도전서 10:31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다. 또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라는 이런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착한 행위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로마서 3:23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죄인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은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서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성도는 삶의 전부가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사람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도록 종교적인 행위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이루신다는 약속이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삶으로 끌고 가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나의 구원도 아니고, 전도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내세에 대한 것도 아니다. 성경이 기록된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언약을 주셨고 그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결과로 인해 주어진 은혜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가두어 두신 이유는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누리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인간 쪽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철저히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의 비밀을 아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신 언약의 내용을 알 수 없기에 바울 사도는 여기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라고 선언한 것이다. 솔로몬도 이렇게 고백하였었다.

 

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24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전 7:23-24)

 

우리 성경은 풍성함이 지혜와 지식을 꾸며주는 말처럼 이해되는데 이 말씀의 의미를 살려서 표현하자면 ‘오!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함이여,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여,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이여, 하나님의 판단은 찾아낼 수 없고 하나님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흔적을 일부분 나타내 주셨으나 나머지는 추적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알려주신 만큼만 알 수 있다는 뜻이다(참고 욥 5:9, 9:10, 34:24).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세 가지 질문을 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4-35절). “모사”(헬, 쉼불로스)란 ‘조언자, 상담자’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두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참고 욥 15:8).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 40:13)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렘 23:18)

 

이 질문은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하는 질문이 아니다. 도리어 대답할 말이 없게 하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가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다. 누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대하여 상담자나 도움을 주는 자가 될 수 있었는가? 누가 하나님께 자신을 먼저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갚아 주어야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 구약이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일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바울 사도는 논리적으로 설명해 왔다. 우리 쪽에 근거를 두고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쪽에서 구원을 확인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접붙이심을 받은 결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게 된 것으로 하나님 편에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것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고, 그 생명 안에서 살게 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며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일하셨다.

우리가 다 구원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았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상대자가 된다든지,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강조하였다.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 쪽에서 손을 내미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이방인이 부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으니 우리도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십자가를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요함이고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지식이다.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없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말씀으로 로마서의 흐름을 우리가 제대로 좇아 왔다면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절)이라는 결론으로 찬양을 할 수밖에 없다.

흔히들 로마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1-11장까지는 교리 부분이고, 12-16장까지는 교리에 의한 윤리 실천의 부분이라고 나눈다. 저는 거기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리 부분이 있고 윤리 실천 부분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더군다나 윤리적인 실천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윤리란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 윤리’라는 말도 쉽게 잘 하는데 복음 안에서는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용어이다. 기독교란 말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는 말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행할 수 있다는 것 전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이 홀로 하셨다는 증거이다. 인간이 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 편에서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다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12장 이하에서 윤리적인 실천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아직 로마서의 앞부분(1-11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36절을 다시 보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절). 이 말씀은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으로 시작되어서 주님께로 돌아가는 단순한 프로세스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주님과 연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주님과 관계되어 있다.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교회생활 따로 있고, 삶으로서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한 덩어리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자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더 영광스럽게 되는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럽게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어디서 가장 잘 드러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희생을 이루신 것에서 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영광으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복음 12:23에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염두에 두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다(참고 요 12:16, 16;14).

결국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는 말씀은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기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나오고 말미암고 돌아감”이란 헬라어로 ‘에크’(~에서, ~ 때문에, ~때로부터)는 창조의 근원과 출처를 의미하고, ‘디아’(~을 통하여, ~동안, ~와 함께)는 공간적으로는 어떤 것을 통과하여 어디에까지 이르는 것과 시간적으로는 어떤 기간 전체를 의미하며, ‘에이스’(~안으로, ~로 향하여, ~을 위하여)는 방향성이나 목표를 의미한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으로 묶여 진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의 모든 것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아멘”이란 히브리어 ‘아만’(확증하다, 지지하다, 뒷받침하다)에서 온 말로 ‘확실한, 확고한, 진실로’라는 뜻인데 문장의 종결 부분에서는 ‘그러하다, 인정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바울 사도가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그의 몸이 아멘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창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란 전적으로 십자가에 의한 것이기에 나의 행위로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저 ‘아멘!’만 나오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성도이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죽음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상태이다(202201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61.1133-36 하나님의 영광(202201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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