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쉰여덟 번째 강론
로마서 11:17-21
접붙임이 되어
1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7절의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이라고 하였고, 또 19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25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라고 말씀한다.
이런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였다. 마치 구원할 대상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그 정원은 이미 차 있었는데 얼마가 실패하는 바람에 결원이 생겨서 이방인이 거기에 살짝 끼어들어 올 수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또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멀쩡한 이스라엘 중에서 일부를 떠밀어 내시고 실패하게 하여 이방인을 향하여 틈을 만들어 놓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그렇게 일을 처리하시는 분이 아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셨는데 그것이 문제가 생겨 응급처치하는 재주를 부리시는 분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할 것을 예상하지 못해 거기에 이방인을 채워 넣는 식의 실수는 하나님의 언약에 애초부터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으로 일관되게 일하신다. 그 목표하시는 바와 목적은 언제나 선하고 의로우며 거룩하시다. 그리고 그 이루시는 방법도 언제나 선하고 아름다우며 완전하시다.
로마서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복음을 죄와 연관하여 설명하면서 8장까지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근거한 구원인 것을 나타내니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의문은, ‘그러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택하신 구약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스라엘이 왜 실패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9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믿음에서 난 의를 이스라엘과 연관하여 설명하면서 믿음의 출처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 11장의 초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1-2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강론에서 생각했었던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라는 말씀이 단순히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보여주고 말씀하고자 했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생각했었다. 제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것이 되었다면 떡도 거룩한 것이고 뿌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가지도 거룩하다고 하였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하나님께 합류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합류되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내셨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거룩하게 되라고 요구하시는 명령이 아니라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시겠다는 약속이다.
이런 점에서 거룩하신 분께서 진짜 이스라엘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것을 본문 17절에서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이라고 하여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감람나무로 표현하였다(참고 시 52:8, 호 14:6).
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렘 11:16-17)
예레미야 선지자도 선포하였듯이 가지가 꺾였다는 것은 하나님께 거부되어 심판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도 가지 얼마가 꺾이었다고 하였는데 이스라엘은 이미 참감람나무가 아니라는 뜻이고, 뿌리가 있는 나무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인다는 것은 뿌리에 의해 제대로 된 감람나무가 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 성경이 처음 번역될 때 중국어 성경을 참고하여 번역하였기에 감람나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사실 중국의 감람나무와는 다른 종류로 올리브나무이고 돌감람나무도 야생 올리브를 의미한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접붙이는 방식에 대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야생 올리브나무에 올리브나무를 접붙여야 좋은 올리브 열매를 얻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올리브나무에 야생 올리브나무를 접붙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로 야생 올리브 열매를 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나타내는 이 비유의 초점은 어떤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고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는다는 것에 있고, 그 뿌리의 진액을 받음으로 야생 올리브나무가 올리브나무가 된다는 것에 있다. 우리 성경에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참’이라는 말이 없다(이 말을 가지고 문자적으로 ‘진리의 나무’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단어 자체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진액”이란 헬라어로 ‘피오테스’인데 ‘살찜, 기름짐’이라는 뜻이다. “함께 받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슁코이노노스’라는 말인데 ‘쉰’(~와 함께)과 ‘코이노노스’(동료, 참여자, 분배자)의 합성어로 ‘공동참여자, 함께 나누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뿌리”란 ‘기초, 근원, 원천’을 의미한다. 즉 야생 올리브나무가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져 그 근본적인 원천인 기름짐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7절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올리브나무일지라도 잘라내고 야생 올리브나무를 접붙여서라도 본래의 올리브나무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언약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변함없이 계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이 누가 실패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잘라내고 다른 사람으로라도 채워 넣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가지로 붙어 뿌리와 연결된 자가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행위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이라도 잘라내신다. 즉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세웠듯이 동일한 원리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에 의한 구원이다. 올리브나무였던 이스라엘이 야생 올리브나무인 이방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올리브나무가 되었다면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참여된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접붙임이 된다는 것은 야생 올리브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접붙이시는 자의 손에 붙잡혀 접붙임을 당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접붙이시는 자의 손에 들려져야 하기에 접붙이시는 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접붙이심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 자랑할 것이 있는가? 결코 없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8절)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이 잘못해서 그 혜택이 이방인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며 또한 이방인이 자기 행위로 무엇인가를 잘 하였기 때문에 믿음에 참여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방인은 스스로 우쭐대면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스스로 자신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보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전하다’(헬, 바스티조)라는 말은 ‘운반하다, 나르다’라는 말인데 누가복음 7:14에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음에서 관을 메고 간 것이나, 사도행전 3:2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를 메어 미문에 두었다는 표현으로 쓰인 말이다. 즉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근원이고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짐에 의해 운반되지 않고 옮겨지지 않으면 죽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방인인 야생 올리브나무는 원래 나무인 이스라엘에 붙혀져 그로부터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누가 성취하고 확증하시는가? 누가 올리브나무가 되게 하시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 따라서 노아나 아브라함, 모세나 다윗이 대표가 아니라 그 언약의 인물들이 지향하고 보여주고자 한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표이시며 거룩한 첫 열매이시다. 노파심에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때 대표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기 백성들을 다 품고 있다는 측면에서 대표이다.
따라서 11:1에서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은 자기 백성이란 근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은혜를 입은 자기 백성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 행위를 내세우면서 자기를 자랑하는 자라면 이스라엘일지라도 하나님은 과감하게 잘라내신다는 것이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져서 부름받은 자는 자기 행위, 자기 의를 말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19-20절)라고 한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여 이스라엘을 잘라내신 것은 나를 접붙이시기 위한 것이 맞다고 증명하는 말씀으로 오해하나 그런 뜻이 아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이렇게 번역하였다.
19 여러분은 “저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20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이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할지언정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19-20절/공동번역)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라는 말은 죄인이 자신의 믿음으로 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믿지 않는 가운데 두셨고 (이방인으로 질문하는) 너는 믿음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올리브나무에 야생 올리브나무를 접붙이는 비유를 통해 근원이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참여되는 은혜가 믿음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은혜를 안다면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 자랑을 할 수 없는 자이다. 거룩하게 하는 기준이나 근원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이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공로나 자랑거리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202112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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