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57강 로마서 11:13-16 거룩한 처음 것

불편한 진리 2021. 12. 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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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쉰일곱 번째 강론

로마서 11:13-16

거룩한 처음 것

 

로마서 9-11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11장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을 무척 어려운 일로 여기는 것 같다.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기존의 해석이 뇌리에 너무 깊이 박혀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 많은 설교들을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 없이 이방인만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설교 내용의 대부분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왜 중요한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결론은 이스라엘의 선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성경에 나오는 나라이기 때문인가? 이렇게 성경을 보는 근본적인 오류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하면 인간 구원론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받기 위해 교회에 나온 나 자신은 이스라엘과 같은 존재로 이미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다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중요한 사안으로 보고 그것과 연관하여 나의 구원을 설명한다. 그래서 항상 나는 구원받아야 하는 당위성으로 가지고 어떻게 영생을 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하나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것에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을 언약의 말씀으로 드러내셨는데 그 언약의 실체요 종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시는가로 성경을 볼 때만 하나님의 구원을 은혜에 의한 것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언약의 통로 역할을 한 것으로 그 의미를 다 하였다.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내려고 한 내 안의 이스라엘이 다 무너져야 한다. 내가 이스라엘로 실패하고 죽은 존재, 곧 이방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항상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절)라고 다소 뜬금없이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이방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5-28)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였을 때 받아 들이는 자들도 있고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이방인이 들으리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방인이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을 제외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눈과 귀를 열어 복음을 듣게 하신 자이다. 이런 점에서 한 마디로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자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 자기 행위들을 꺼내놓을 수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할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제사를 행한 것도 아니며,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물론 이방인이라고 해서 자기 행위가 전혀 없는 자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여 자기 의를 만들어 내려는 이스라엘과 대조해서 그렇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바로 이런 자들을 향해 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의미에서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4-15절)라고 하였다.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누구에게든지 은혜에 의한 구원의 복음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이라는 것을 안다는 의미이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란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인데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 내려는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뜻이다. 결국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나온 의로써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버리심으로 세상, 즉 이방인들과 화목이 되는 것인데, 만약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계속 세상과 등지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버린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곧 세상에 생명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번역하였는데 ‘세상에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쉬운말 성경은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심으로써 세상과 화목을 이루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심은 죽은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번역하였다.

즉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과 이방인의 화목이 되는 것이라면 또한 그들을 받아들이시게 된다면 그것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다는 그들은 누구인가? 단순히 이스라엘이나 혹은 그 일부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다.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셔서 살리는 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린 그 자리, 즉 죄인에게는 의가 없음이 확인된 죽음의 자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은혜로 주어져야 생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것은 버림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죄인에게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그 어떤 의도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버리고 죽이신 그 자리에서 생명을 주심으로 죽은 자가 어떻게 생명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율법적 행함과 자기 의를 자랑하는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면 그 버림받은 자리에 바로 이방인인 우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고,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자리에서 자기 백성, 내 아들들로 부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그 곳에서 나의 모든 행함과 의가 결코 하나님의 의에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십자가 은혜에 의해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전환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이다. 그래서 이미 6장에서 이렇게 선언했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3-5)

 

그리고 16절에서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라고 했다. 이 말씀 또한 문맥과 상관없는 갑툭튀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구약을 근거로 이스라엘 안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더 설명하고 싶은 것이다.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 19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20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 21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민 15:17-21)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는데 처음 것을 거제로 드리게 되면 드려지는 제물은 물론이고 나머지도 다 거룩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처음 추수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나머지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결국 제물의 처음 것에 대한 말씀은 이 땅에 제물로 오실 언약의 한 인물을 겨냥하고 있고 그 인물이 하나님의 온전한 것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첫 열매의 원리를 이렇게 밝힌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0-26)

 

하나님의 복음으로 이루시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구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에 의한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 된 자들이 생명이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처음 것에 속한다면 그 처음 것에 의해 거룩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이스라엘 나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언약의 온전한 실체가 되시는 참 이스라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선언한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약 1:17-18/새번역성경)

 

결국 본문이 나타내는 의도는 이스라엘 전체가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진다면 이스라엘일지라도 이방인으로 만들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9장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9:30)라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단순히 이스라엘이라서 실패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의해 언약대로 일하시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으시며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생명에 합류시키시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반드시 이루어 내신다는 뜻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다(202112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57.1113-16 거룩한 처음 것(202112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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