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16강 로마서 2:25-29 유대인과 할례

불편한 진리 2019. 7. 28. 18:40

❖ 로마서 열여섯 번째 강론


로마서 2:25-29
유대인과 할례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 바울 사도는 이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랑의 요소로 삼는 할례를 들어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최대의 특권으로 간주하며 외적으로는 율법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 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시인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요 자랑거리였다.

바울은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25-26절)라고 하였다. 율법을 지킨다는 전제 하에서 할례가 유익한 것이지 율법을 어긴다면 할례는 할례가 아닌 것이 된다고 선언한다. 또한 거꾸로 의식으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자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지킨다면 할례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지킨다는 표현을 ‘퓔라소’로 언급하였다(퓔라소의 원형은 ‘피오’인데 ‘꺼내어 놓다’, ‘만들어 내다’, ‘밖으로 보여 주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의 죄를 폭로하면서 굳이 할례에 대한 문제까지 언급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더라도 할례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 초대교회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있었다. 한 마디로 초대 교회의 핫이슈였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할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 15:1)


그러면 할례란 무엇인가? 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유대인들이 특권으로 여기고 있고 자랑으로 삼는 할례를 가지고 공격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던 것일까? 할례란 남자 생식기의 끝을 자르는 것으로 유대인이라면 난지 8일 만에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17장에 처음 나타난다.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14)


이것이 나중에 율법으로 규정되어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출 12:48)라고 하여 할례 받지 않은 자는 유월절에 참여하지도 못하였다.

왜 유대인들에게 이토록 중요한 할례로 주어졌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받아들였지만 그 방법이 사라를 통해서도 상관이 없고 하갈을 통해서라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아 언약의 후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 아들이 약속의 아들인줄 알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으로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할례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란 아브라함이 혈통에 의한 인간적인 출산의 방식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주신 언약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마엘의 출생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고 씨를 가진 존재로 착각한 결과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생식기 포피를 잘라냄으로 ‘아브라함 너는 죽은 존재야!’, ‘너는 죽어야 돼!’라는 의미를 담아 더 이상 약속의 후손은 인간의 생물학적 활동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놓으신 것이 할례이다.

고대 중동 지역에 여타 민족들에게도 할례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에게 할례란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선택의 표시가 되었다. 다른 민족하고는 씨가 다르다는 차별성에 대한 문제를 성경에서는 ‘거룩한 민족’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는 말은 윤리 도덕적으로 고차원적인 민족이라거나 행동이 깨끗하고 신사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인간적인 핏줄과는 전혀 다른 계통에 의해서 생겨난 민족이며 본래 남자 쪽의 가문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르는 할례를 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 출현된 민족이다. 인간의 핏줄과 관련있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민족이라는 말이다. 할례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 놓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겉으로는 할례를 행했다고 하지만 만약 그 안에 약속의 정신이 빠져나가면 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외적으로 할례의 흔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뜻을 가지고 바울은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7절)라고 했다. 즉 오히려 의식적으로 할례를 받지 않은 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면 문자의 율법에 매여 율법을 범한 유대인들을 정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8-29절)라고 선언한다.

우리 성경에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본문을 직역하면 ‘영으로 하는 마음의 할례’라는 말이다. 즉 ‘성령에 의해 마음에 하는 할례’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마음에 할례를 할 것으로 말한 것은 그가 새삼스럽게 밝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율법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바울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가 중요한 것이라고 구약에서도 밝히고 있다. 마음에 하는 할례란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바대로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에 하는 할례를 에스겔 선지자는 새 영을 주셔서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이렇게 선포한다.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바울 사도가 말한 ‘영으로 하는 마음의 할례’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표면적”(헬, 파네이로스)이란 공개적이며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을 말하고 “이면적”(헬, 크륍토스)이란 내부적으로 감추어져 은밀한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6:4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은밀한’으로 번역된 말이 ‘크륍토스’로 하나님은 은밀한 자 가운데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즉 은밀한 자, 이면적 유대인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라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고 율법이라는 문자(조문)를 곧이곧대로 지켜서 행하려고 하는 자들이 표면적 유대인이다. 할례를 자랑이요 특권으로 여기고 있는 것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한 결과가 무엇인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인간의 혈통을 거부하고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예수님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심으로 할례 언약을 성취하셨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이 선포는 우리에게 굉장히 거리가 있는 말씀으로 들려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는 할례가 지켜야 할 규례로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공격하면서 복음을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 할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그 어떤 ‘인간의 의’를 갖다 붙일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고자 함이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2-17)


오늘날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 입에서 복음을 안다면 그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우리의 삶’이라는 의를 십자가에 들이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특징이 성숙이나, 성장이라고 말하면서 그 특징이 드러나는 것이 자라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자람, 성숙, 성장은 시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하늘적 생명의 특징이 아니다.
영생이란 시간을 초월한 상태이기에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성도는 묵시를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간(역사) 속에서 날마다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할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새겨 묵시의 세계를 살도록 일하시는 은혜를 성령께서 베푸시는 자를 성도라고 한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728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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