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2:13-21 어리석은 부자 비유

불편한 진리 2018. 11. 5. 15:04

예수님의 비유 강론 14

 

누가복음 12:13-21

어리석은 부자 비유

 

오늘 같이 나눌 예수님의 비유는 소위 어리석은 부자 비유이다. 이 비유도 세상에서 돈을 가지는 탐심이 문제이며 그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비유라고 대부분 이해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6:19-20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는 교훈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비유는 천국 비유이다. 단순히 우리더러 탐심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죄짓지 말고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는 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가르침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타내신 비유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라고 한 것을 보면 어떤 한 사람이 유산 문제로 인해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그 억울함을 예수님께 찾아와서 호소한 것에 기인한다. 신명기 21:15-17과 민수기 27:1-11에 상속에 관한 규례가 명시되어 있지만 예수님께 나온 자는 율법의 규례에 따라 재산 분배를 받지 못한 것 같다. 당시의 율법사나 랍비들은 백성들의 여러 가지 율법에 관한 문제를 상담해 주었기에 재산에 대한 고민을 안고 나온 자는 예수님을 율법사나 랍비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예수님이라면 자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유산 문제로 인해 예수님을 찾아 나온 이 사람이 무엇이 문제일까? 외형적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고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성경을 보면서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는가? 살면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인간은 자기 문제를 신앙으로 해결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종교를 가질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4-15)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탐심(, 플레오넥시아)이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열망이라는 뜻이다. 형과의 재산 분배가 제대로 되기를 원해서 자신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탐심이라고 지적하신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정도로 보았다는 것 자체가 탐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가지고 생명과 대조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문제는 생명이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계시지만 그분을 생명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소유의 넉넉함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기를 원한 것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이런 탐심으로 종교를 가진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고 가지는 종교는 모두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신앙으로 짜여진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은 이런 탐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5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비유의 내용인즉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많아지자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고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라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엄밀히 말하자면 부자의 이 마음이 죄악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하나도 문제 삼을만한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문제라면 오늘날 우리가 보험을 들고 연금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죄악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것을 예수님께서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폭로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여기서 어리석은 자란 곧 무지한 자”(92:6, 94:8)이며 지혜 없는 자”(9:4)이며 우둔한 자”(32:5)이며 미련한 자”(4:22)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14:1, 53:1)라고 하였다.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는 어리석은 자란 하나님은 없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또한 본문에서 물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가도스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선한 것이라는 뜻이다. 부자는 자신이 쌓은 곡식, 그 곡식을 쌓기 위해 더 크게 지은 곳간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즉 부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자기가 쌓은 것을 선으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부자에게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이 쌓은 선이었다.

그래서 비유에 대한 마무리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1).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나타내셨다. 사람은 소유의 넉넉함을 생명으로 여겨 자신이 쌓은 것을 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오늘 밤에라도 인간의 호흡을 취하실 수 있는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그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생명이시다.

누가복음 본문의 좀더 폭넓은 문맥을 살펴 보면 11:37-52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죄를 폭로하셨다. 율법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자들에게서 율법에 의한 외식, 위선들을 철저히 벗겨서 인간의 실체가 죄인 그 자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는 율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자신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죄인된 실체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재물이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인간의 죄악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율법으로 자신을 가리며 살고 있었는데 재물이 주어지니 인간의 탐심이 다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탐심을 부리는 주체가 누구이며 탐심의 끝은 어디인가? 결국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며 폭로하신 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탐심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 탐심의 끝은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지만 그것의 한계를 느낄 때 하나님이라도 동원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죄악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 “내가라는 말이 6번이나 쓰이고 있는 것을 보아서 이 부자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자기 의로 삼고 철저히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죄를 폭로하심으로 그것으로 하늘의 의를 이룰 수 없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에 생명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더해진 외부적인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의 실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비유에 이어 예수님께서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 것인가 혹은 자기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항상 염려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그러기 때문에 염려하며 살지 말라는 말씀인가?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도무지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온전한 생명을 십자가로 나타내셨다. 그래서 본문에 이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28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12:28-32)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대부분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 말씀대로 오직 하나님 나라만 구하면서 살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한다.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면 인간은 탐심으로 끝없이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존재로 살 수밖에 없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죄인을 품으시는 방법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품어 주셔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내가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그 말씀을 내 소유로 붙잡아 버린다. 탐심의 주체가 바뀌지 않고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그 하나님의 원하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소유란 탐심과 반드시 연관되어 있다. 탐심을 초월한 존재가 이 땅에 있는가? 이 땅에 어느 누구도 탐심에서 자유로운 자가 있을 수 없다. 율법으로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게 되면 그 복음조차도 지식으로 나의 소유로 삼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명령어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런 모습으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이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5:5)

 

(http://cafe.daum.net/joosung 20181104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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