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불편한 진리 2018. 9. 5. 14:03

예수님의 비유 강론 13

 

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가 말씀하고자 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되 단순히 낙심하지 말고 열심을 내어 끈질기게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천국 비유라면 이 비유 역시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상에서 무시하는 과부와 같이 이 땅에 오셔서 진짜 믿음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분이시기에 인자가 다시 오실 때에 그분이 주신 믿음을 발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하심을 담고 있다면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천국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는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9)라고 시작한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앞의 비유와 연결하여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흔히들 이 비유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어떤 것인지를 교훈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유의 서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바리새인과 세리가 하는 기도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신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라는 종교적인 행위 속에 드러난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을 통해 천국을 말씀하신 것이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10)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였는데 그 상황은 확연히 달랐다. 성전에서 제사가 이루어지면 제물을 가진 자들은 제단 가까이 모여 들었다가 제사장이 그 위에 놓인 양을 잡아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게 된다. 제물을 잡는 예식을 마치면 제사장은 성소 안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제사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마치면 다시 제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제사장이 제단을 떠나 성소에 들어간 때에 제사에 참여한 자들은 각자 기도를 하는데 바리새인과 세리가 한 기도는 이때 행한 기도라 할 수 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라고 하였는데 바리새인이 서서 기도하였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라 할 수 있다.

기도에서 드러난 이 바리새인의 삶은 토색하지 않으며 불의와 간음을 행하지 않고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이다. 또한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한 자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인정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리가 저지르고 있는 죄들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흔히 오늘날 교인들의 기도와 같이 무엇을 달라고 기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란 누구를 암시하고 있는가? 기도를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바로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있는 자였다. 믿는다고 하는 말은 아주 확신한다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다 진짜 믿음이 아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이런 것이 바로 우리 모든 죄인들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12:2)라고 하셨다면 이 땅의 인간들의 믿음은 다 가짜라는 말이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믿음이다. 그런 바리새인이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고 하였는데 여기 다른 사람”(9,11)이란 말은 나머지 사람들’, ‘남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즉 자기 외에 나머지 사람들을 멸시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자기 의와 비교하여 아주 하찮은 사람들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죄인 중의 죄인이라 할 수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음에 대해 감사한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라고 하였다. 이것이 세리의 기도였다. 아니 이것이 세리의 마음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세리는 로마 정부로부터 할당받은 세금의 양을 바치기 위해 동족들에게서 그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 일부 착복한다는 인식 때문에 유대인들은 죄인의 대표상으로 치부하였다. 그래서 세리와 창녀”(21:31-32), “세리와 죄인들”(9:10-11, 15:1)을 같은 부류의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이란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나 흠이 없는 자들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건한 자들의 대표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세리보다 바리새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자,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였고 비유의 결론을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예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

비유의 결론은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기도를 비교하신 것이거나 종교 생활을 비교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그 다음 성전에서 내려가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말씀하고자 하신 것도 아니었다. 본문은 세리가 기도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그 다음 삶에 대해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의롭다고 하시느냐 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한 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세리였다. 본문에서 세리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는데 헬라어에는 앞에 정관사(, )가 붙어 있다. 내가 그 특정한 죄인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온 세상 가운데 누구도 탓할 자가 없고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은 자기 자신 혼자라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완전한 절망 가운데 있어서 도무지 하나님의 의에는 도달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리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대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의 근거가 우리 쪽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말씀을 또 율법으로 붙잡아 버린다. 우리 자신을 이렇게 낮추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우리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었다(16:15). 우리 역시 마찬가지 인간이다. 토색하지 않고 불의, 간음하지 않은 것이 결코 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 의가 되지 못한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Q.T를 하며 매일의 삶을 말씀으로 살려는 결심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의는 가짜 의이기 때문이다. 의롭다고 하심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3:21-26)

 

그러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낮추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페이노오라는 말인데 이 말은 타페이노스’(떨어뜨리다, 내던지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리고 높이다라는 말은 휩소오라는 말인데 휩소스’(하늘, 고도)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스스로 높이는 자는 자기를 의롭다 여기는 자이고 곧 자신이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결국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곧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를 떨어뜨리시고 자신을 완전한 절망 가운데 내던져져 있음을 인정하는 자를 하늘로 보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늘로부터(위로부터) 의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1:78, 24:49).

하나님은 이렇게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뜻을 좇아서 사람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것과는 반대로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의로 여기고 자신의 의를 기준으로 해서 살아간다. 상대를 자신의 의에 맞추기 때문에 항상 나는 의롭고 다른 사람은 의롭지 못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괜찮은 존재인가? 결코 착각하지 말라! 의가 없는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렇다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결코 종교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셔야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앞에서 불의한 재판장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을 선포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라고 하셨는데 그때에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 믿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은혜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다(20180812 강론/김영대).



비유13. 눅 180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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