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마태복음 11:16-19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비유

불편한 진리 2018. 8. 15. 13:37

예수님의 비유 강론 10

 

마태복음 11:16-19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비유

 

요한은 율법과 옛 선지자의 시대를 마감하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요 언약의 실체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여 선포하였기에 선지자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어디까지나 율법과 선지자의 옛 시대에 속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요한은 큰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가? 이에 예수님께서 천국은 요한의 때부터 강하고 힘차게 이 세상으로 밀고 들어와 전진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내신 천국에 참여된 자는 요한보다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큰 자, 작은 자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로 온전히 이루신 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가 큰 자라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요한에 대한 말씀을 이어가시면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6-17)라고 하셨다. 본문의 비유는 한 마디로 아이들이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장터에서 아이들이 결혼식 놀이를 하면서 피리를 불면 다른 친구들이 와서 동조하며 춤을 추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다른 놀이로 바꿔 장례식 놀이를 한다. 장례식 놀이에서 슬피 울면 친구들이 와서 참여하여 가슴을 치며 장례식 놀이에 동조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비유의 내용이다.

우리는 간단한 내용의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쉽게 생각한다. 그래서 흔히들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이 서로 대조적이었는데 요한이 금욕적인 삶을 통해 슬퍼하는 표현을 하였지만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동조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잔치를 열어 피리를 불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 복음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영적 혼인 잔치의 기쁨이나 세례자 요한이 전한 회개의 세례도 이 세대는 그저 아이들의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비유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결코 이런 이해가 논리상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이렇게 이해되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순서가 바뀌어야 맞다. 즉 장례식 놀이에 대한 말씀이 요한에 대하여 하신 비유이기 때문에 앞으로 와야 하고 결혼식 잔치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뒤로 가야 한다. 그래야 역사적인 순서에 맞는 비유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피리를 불었을 때 춤추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이며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이 세대라는 말씀이다. 이 세대는 마치 다른 아이들을 향해 왜 우리가 부는 피리에 춤을 추지 않느냐? 왜 우리가 애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느냐?”라고 따지는 아이들과 같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노는 놀이에 함께 참여하지 않고 따로 노느냐고 불평하는 자들과 같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8-19).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요한이 광야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니까 귀신들려 미쳤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먹고 마시니까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하여 삶이 문란하다고 비난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이 세대를 대표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율법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제사장을 비롯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제사장을 비롯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피리를 불면 요한은 춤을 추었어야 되고 우리가 슬피 울면 예수 당신은 가슴을 쳐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잔치 분위기에 요한은 금욕적으로 금식을 하며 지냈고 장례 분위기에 예수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요한과 예수님을 향해 자기들에게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세대라는 말씀이다. 자신들의 종교적 욕심을 철저히 내세우는 세대임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폭로하셨다.

세례자 요한을 맞는 이스라엘의 태도는 완악하고 악의적이었다. 요한을 향하여 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금식으로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는가? 귀신 들린 것이 아닌가? 더러운 영에 미혹되어 엉뚱한 소리를 하는 자라고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세리를 불러 제자를 삼으시며 그들에게 베풀어진 은혜와 긍휼을 함께 나누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쾌락을 탐하는 자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종교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요한과 예수님이 맞추어 주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된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요한이 전한 것이나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이나 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금식을 통하여 베풀고자 하는 은혜도 알지 못하고 죄 사함의 긍휼과 은혜도 모르는 세대였다.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금식을 주신 시기의 하나님의 뜻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쁨의 혼인 잔치의 때를 주신 하나님의 뜻도 다 이해하지 못한 세대였다.

사실 요한이 금식을 하며 지냈던 시기나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를 하였던 시기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 보았던 것처럼 율법과 선지자의 때가 요한의 때까지이므로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혼인 잔치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시대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혼인 잔치의 때를 맞이하여 금식하며 기다리고 소망하던 은혜가 성취된 것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요한의 때나 예수님의 때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 안 먹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누구를 드러내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이렇게 말씀하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런데 당시 세대가 요한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 둘 다 싫어하고 배척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세우신 이후 지금까지 그들의 역사를 통해 나타내고 이루고자 하신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질적인 뜻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지켜 영생을 누리려는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 온 무지와 불신앙의 모습을 고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그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율법을 주시고 그들의 죄악상을 그대로 드러내신 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죄악상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우리들의 죄악의 실상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이 세대 역시 예수님 때의 이 세대나 동일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9)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율법의 옛 틀을 가지고 스스로 의인으로 가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러기에 구약에서 특히 솔로몬이 그렇게 노래하였던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던 것과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지혜라고 하나 결국 그것은 모든 죄인들의 죄다. 다시 말해서 참된 지혜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기 지혜()로 천국을 이루어 내려고 한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지혜()로 천국을 거부하고 주님을 밀어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이들이 장터에서 노는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다.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6-9)

 

지혜이신 예수님의 목적은 십자가에서 죽는 대속의 죽음이다. 그것이 새 언약의 성취이다. 따라서 여기서 행한 일이란 십자가로 말미암아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진리이며 의롭다고 인정될 것이라는 뜻이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에서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7:35)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누가복음 본문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비록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자기들의 종교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 할지라도 온전한 지혜이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기 자녀들을 기필코 만들어 나가실 것이고 그 자녀들로 말미암아 진리이며 의롭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율법의 옛 틀을 고수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의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자기 의를 진리로 반드시 드러내실 것이다. 죄인들의 어떤 비난이나 방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온전한 지혜이시며 하나님 나라가 되신다는 것이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어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율법이나 인간의 종교놀이로 영생을 취하려는 죄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 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그 말씀의 성취를 믿는 것으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된 은혜를 입은 자가 성도이다(20170101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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