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8:1-8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

불편한 진리 2018. 9. 1. 14:23


예수님의 비유 강론 12

 

누가복음 18:1-8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

 

누가복음 18장에는 두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1-8절은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이고 9-14절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이다. 이 두 비유는 표면적으로 보면 너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비유이다. 흔히 우리는 비유가 쉽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이해된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기에(4:11-13) 우리의 생각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그 뜻대로 이해하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어떤 나라로 나타내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살펴볼 비유는 불의한 재판장 비유혹은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라고 불리는 비유이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고 과부와 같이 끈질지게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쉽게 이 비유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표면적으로 문자로만 이해되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뜬금없이 하신 비유가 아니기에 어떤 의미의 말씀을 하시는 문맥 속에서 말씀하셨가를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본 비유를 말씀하신 앞뒤 문맥에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17:20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가를 물으니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0b-21)라고 하셨다. 그리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된 후에 나타날 것인데(25)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는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은 상태, 즉 아무도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고 세상에 빠져 있을 때에 인자가 오신다는 것이다(30).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날, 즉 인자의 다시 오심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18:15에 보면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올 때 제자들이 그들을 제지하며 꾸짖자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8:16)라고 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7)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날 하나님 나라를 인자의 오심으로 말씀하시면서 그 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본문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비유는 인자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그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 나라에 어떤 자가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신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본 비유의 동기는 명백하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뜬금없이 너희들이 기도를 하되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계속 과부와 같이 이런식으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말씀하셨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냥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그 다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2-3)라고 말씀하셨다. 과부의 요청이 무엇인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원수라는 말은 헬라어로 안티디코스라는 말인데 안티’(반대하여, 대신하여)디케’(옳음, 공의, 정의)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원수라는 말은 공의를 반대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원한이라는 말은 에크디케오인데 에크’(~으로부터)디케’(옳음, 공의, 정의)의 합성어이다. 즉 원한을 푼다는 것은 공의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제대로 드러내시면 그것이 바로 원한을 갚는 것이 된다(참고 롬 12:19).

과부가 그렇게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였지만 재판장은 듣지 않고 있다가 후에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5)라고 생각하였다.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한다(, 휘포피아조)는 말을 직역하면 눈 밑을 때린다는 말이다. 우리 말에 눈에 밟힌다는 말이 있는데 잊혀지지 않고 눈에 선하여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눈의 가시같다는 말을 하는데 이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과부가 계속 요청함으로 재판장에게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로 눈에 선하여 잊혀지지 않는 그런 존재이기에 그 요청대로 들어 준다는 것이다. 과부가 이렇게 요청한 것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과부의 원수는 단순히 개인적인 원수 관계에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는 자이고 과부가 풀어 달라는 원한도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과부는 개인적인 원수, 개인적인 원한을 하나님께서 처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드러나기를 구하고 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과부의 기도가 얼마나 끈질기게 열심히 기도하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부의 기도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과부가 요청한 정당함에 대조하여 이 재판장에 대해 얼마나 불의한 자인가를 불의한 재판장”(6)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신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6-8). 어떤 해석을 보면 이 본문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믿음만 보시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드릴 것이 있다면 십일조를 비롯해 주일성수를 하며 교회에 봉사를 통해 우리의 모든 믿음의 행위를 보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조금만 더 면밀하게 살펴 보면 결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행위도 보신다는 뜻이 아니다. 본문을 풀어서 보자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그 믿음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the)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그 믿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란 무엇을 지칭하는가?

폭넓게 보면 17:6에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라고 하였을 때 그 믿음이고 그 믿음은 곧 본문 안에서 보자면 과부가 원한을 풀어줄 것이라는 정당성을 가지고 요구하는 그 믿음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과부란 단순히 남편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남편으로 삼고자 하는 상태에 있으며 그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고아와 나그네와 같이 누군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도무지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자이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억울함과 원한이 있으면 자신을 과부의 상태로 있게 하신 하나님의 힘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태임을 고백하는 자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죄인의 상태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그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래서 택하신 자들을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께 택하신 자들이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에(3:17) 십자가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곧 택하신 자들이다. 택하신 자의 원수는 사탄이며 사탄은 하나님의 공의를 거부하며 반대하는 세력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원한을 풀어 주신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심은 받아 하나된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는 대조적으로 자기 공의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오래 참으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이 모든 것이 세상의 것에 집중된 상태에 있는 이 땅에 과부와 같이, 고아와 나그네와 같이 죄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몸, 한 운명이 된 자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만 드러나도록 항상 낙심하지 않으며 기도하는 자이다. 즉 하나님의 원하심을 구하며 사는 자이다. 하나님은 자기 의, 자기 나라를 빈틈없이 드러내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난 하나님 나라이다. 세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목표로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사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가진 분 곧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되어 있다.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1-33)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9:11)

 

결국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끈질기게 기도하거나 열심히 기도하되 단순히 낙심하지 말고 열심을 내어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무시하는 과부와 같이 이 땅에 오셔서 진짜 믿음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분이시고 그분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이 주신 그 믿음을 발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하심을 담고 있다면 낙망하지 말고 인자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 믿음에 의해 살 것이다. 그것만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이다(20180729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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