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1:5-8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

불편한 진리 2018. 8. 28. 13:39

예수님의 비유 강론 11

 

누가복음 11:5-8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강청하여 끈질기게 구하면 하나님께서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비유이다. 이렇게 오해가 심한 이유는 본문의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의 문맥은 1-4절에서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나온다. 그리고 후의 문맥은 9-13절을 통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사이에 본 비유가 위치해 있다. 5절에서 또 이르시되라는 표현은 1-4절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이고 9절에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5-8절과 연결하여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문은 1절에서 13절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문맥 안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기도를 말씀하신 문맥 안에 있고 기도에 대한 비유가 분명하다.

1절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니까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자기 종교단체의 신앙고백을 기도문 형태로 가지고 있었고 세례자 요한도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이런 기도문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바로 2-4절에 기록되어 있고 좀더 완전한 형태로는 마태복음 6:9-13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는 5절 이하에서 본 비유를 말씀하신다. 흔히 알고 있듯이 벗이 간청함으로 떡 세 덩이를 구하는 비유이다. 비유의 내용은 간단하다. 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것이 없었기에 마을의 친구를 찾아가 떡 세 덩이를 요구하였는데 이미 문을 닫고 누웠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벗 됨으로 인하여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간청함을 인하여 준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보통 이 비유 안에서 상징하는 많은 것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풀어 은혜를 끼치고자 하는 해석들이 많다. 예컨대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고 세 덩이는 삼위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며 밤은 영적인 어둠을, 벗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많은 상징적인 해석들에 빠지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본질적인 핵심을 놓치기 쉽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징적인 해석들의 근거가 성경적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비유의 형식을 보면 너희 중에 누가 ~하겠느냐?”(5-7)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모두가 공감하는 답변을 얻고 누구도 다른 답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시는 물음을 많이 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주며 전갈을 주는 아버지가 있겠느냐?”(11:11-12),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12:25)라는 물음에 예상되는 답변은 누구도 그렇게 할 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도 끌어내지 않겠느냐?”(14:5),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에 완공까지 족할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14:28), “너희 중에 누가 양 일백 마리에서 하나를 잃으면 그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다니지 않겠느냐?(15:4)라는 물음에 예상되는 답변은 누구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답변은 다른 답을 예상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시는 물음이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5-7). 만약 누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답변이다. 그러기 때문에 당연한 답변은 아니오! 그럴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강론을 들은 당시 유대인들은 왜 이런 답변이 당연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한 마을에 온 손님은 그 마을 전체의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이며 보이지 않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참고 눅 9:51-56).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다 천국 비유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비유도 단순히 기도에 대한 비유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도로 나타내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이 비유에서 초점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떡을 얻으러 온 자인가 아니면 집 안에서 일어나 떡을 주는 자인가? 우리는 기도를 내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후자, 즉 떡을 주는 자에게 초점을 두고 비유는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간청함이란 헬라어로 아나이데이아라는 말인데 아뉴’(부정접두어)아이도스’(부끄러워하다, 두려워하다)의 합성어이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누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개역개정에서 간청이라고 번역하였지만 개역한글판에서는 강청이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인들 머리 속에 강제로 청하고 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고 그런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본 비유를 자세히 보면 떡을 구하는 사람의 간청이나 강청함, 즉 끈질기게 구한 흔적이 본문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초점은 당연히 떡을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떡을 주는 자에게 있다. 다시 말해서 떡을 주는 주인이 당시 문화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약속에 의해 마을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기 않기 위해 떡을 준다는 뜻이다.

하나님도 이와 같은 분이시라는 것이다. 즉 구하는 자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고자 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비유가 베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신실한 자기 종들을 통해 언약을 나타내셨고 그 언약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신다고 약속하셨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무조건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언약대로, 그 약속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 언약대로 약속 안에서 구한다는 의미는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약속을 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관계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것이다.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십자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하신 것으로 인해 주어지는 성령이시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성령님을 구해야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성령님만이 보증이 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0-22)

 

흔히 기도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내가 기도한다는 측면에서만 생각한다. 내가 기도한다는 말에는 언제나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늘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표현함으로 하나님은 나의 일을 거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분 정도로 여긴다. 오로지 기도하는 자기 자신이 전부이다. 누가 기도를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기도란 말의 헬라어는 프로슈코마이인데 프로스’(~을 향하여)류코마이’(소원, 원함)가 합해진 단어이다. ‘~을 향하여 소원하는 것이 기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향해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 성경에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은 다 죽은 존재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렇게 보자면 인간이 하나님께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해 원하는 마음을 나타내신 것이 기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산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할 수 있으며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 그 원하심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된다.

여기서 기도에 대한 큰 하나의 원칙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주어지는 계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내용이 있고 기도의 테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문은 단순히 외워서 반복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말로 기도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원리와 방식으로 기도하라는 의미로 받아야 들여야 한다. 즉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기도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누가복음 10:22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가 되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의 것에 매여서 땅의 것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10장 후반에서 밝혀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자기 백성들을 섬기시는 그 일하심을 생각한다면 은혜를 입은 성도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며 또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내가 한다는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은혜를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고 그분이 자기 백성들을 언약의 말씀대로 섬기신 그 일하심 앞에 굴복하는 차원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러기에 기도하라고 하신 분의 요구, 원하심을 아는 자가 성도이다(20180708 강론/김영대).



비유11. 눅 1105-08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pdf


비유11. 눅 1105-08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pdf
0.1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