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33.고린도전서 16:1-24 주의 일

불편한 진리 2015. 2. 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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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24 

주의 일

 

이제 우리는 고린도전서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본 장에서는 여러 이름들이 나열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바울 사도 자신에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언급과 앞으로의 계획들도 간단하게 말하면서 문안 인사로 끝을 맺고 있다. 본 장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단순히 바울 사도의 문안 인사나 바울의 개인적인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바울이 개인적인 것을 기록하였다고 할지라도 말씀으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계속적으로 바울을 사로잡아서 어떻게 증거되고 있는가 하는 측면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러 이름들을 열거하면서 바울 사도가 주님의 뜻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되는 이름들을 일일이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찾아서 조사하고 그들의 특성과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말씀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단순히 고린도 교회를 주님의 몸된 교회로 보고 그들을 권면하고 훈계하여 바로 잡아서 교회의 모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본 서신을 쓴 것이 아니었다. 본 서신을 공부하면서 처음에 우리가 상고한 바와 같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의 머리 속에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 따로 있었다. 다만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현실적인 문제 의식을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본질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일 뿐이다. 그 주님의 몸된 교회를 염두에 두고서 고린도 교회가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의 모든 권면은 어떻게 하라는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1-4절을 가지고 흔히 성도들의 연보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헌금에 대한 교훈을 취하기에 바쁜데, 사실 본문은 결코 우리에게 헌금을 많이 하도록 강요하는 본문으로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문맥 자체가 헌금을 이야기하고 헌금을 장려하는 차원으로 말해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 처음부터 복음을 선포하였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현재 고린도 교회 속에 일어난 문제들을 가지고 복음이 무엇이며, 그 복음에 의해 드러나는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1장에서 간단한 문안 인사를 한 후 곧장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쟁과 파당에 대한 문제들을 들먹이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고(고전 1:23),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복음은 서로 분쟁하게 만들고 서로 질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으로 인하여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고전 4:13).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고전 4:20)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서로 복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진정으로 아는 성도라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5장부터 14장까지에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실제적인 문제인 음행과 성적인 문제, 성찬과 예배에 대한 문제, 은사에 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복음을 설명하고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15장에 와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부활로 설명하였다. 15장에 와서 복음을 부활로 설명하게 된 것은 복음을 안다는 것이 단순히 내가 복음을 알기 때문에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 세계 안에서의 삶이 새 생명의 삶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점에서 16장을 이해할 때에도 바울의 개인적인 문안 인사나 헌금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 선포의 문맥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본문 1절에 보면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정확하게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말한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는 갈라디아서 2:10 말씀을 통해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헌금을 통해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다. 헌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나눈다는 차원이다. 바울 사도는 지금 15:58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주님의 일이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는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2절에서도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초대 교회는 의도적으로 주님이 부활하신 매주일 첫날에 모였기 때문에 우리가 일요일에 모이고 또한 예배에는 반드시 헌금이 있어야 한다는 정당성을 이야기하기 위한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예배 시간에 헌금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본문이 그러한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한 것도 매주일 첫날이란 매주 첫째 날마다라는 의미이다. 초대 교회는 거의 매일 모였기 때문에 그 중에서 연보는 매주일 첫날에 해서 저축하고 그것을 바울이 갔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 전달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를 얻은 대로라는 말을 수동태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삶에 필요한 물질을 주신 대로 연보를 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아주 정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것에 대하여 별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지나치다 싶으면 그것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헌금을 단순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의 것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하나님은 인간의 돈이 필요해서 받으려고 하는 분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가 헌금을 하는 것은 세상에서 힘으로 삼고 있는 물질을 주님을 위해 세상의 힘을 흩어버리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를 향해서는 물질에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하면서 교회는 마음껏 부를 축적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 역시 모임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이 있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주님께 감사하는 모습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아무튼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울 사도는 본 장을 통해 주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지 헌금을 강요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10절에서도 디모데를 언급하면서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3,14)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곧 주님의 사랑을 행하는 모습으로 살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둘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사랑으로 행하는 모습이 있다.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모습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운 형편에 처하였다면 연보하여 그들을 돕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다(2001.10.21./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