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31.고린도전서 15:20-34 부활의 삶

불편한 진리 2015. 2. 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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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20-34 

부활의 삶

 

바울 사도는 앞에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차원이 아니라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부활의 세계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죄와 관계없는 새로운 부활의 세계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라고 천명하였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선언하였다.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라는 느헤미야 10:35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구약에서 첫 열매란 맏물을 말한다. 맏물 혹은 첫 열매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에서 처음 것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첫 열매 혹은 맏물을 드린다는 것은 가장 처음 맺은 열매를 드린다는 말이 아니라 추수한 것의 전체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드린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대표적으로 죽으셨고 또한 대표적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1,22)라고 선언하였다. 첫 번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자가 되었다면 두 번째 아담 곧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다시 산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4-19).

 

23절에 보면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죄와 관계없는 생명의 세계가 이 땅에 주어지게 되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활의 세계 안에서 성도는 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의 부활을 그에게 붙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에 개인 구원이냐 사회 구원이냐 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또 어떤 것을 믿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전도뿐만 아니라 구제를 통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하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개인 구원도 아니고 사회 구원도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몸 밖에 없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그분의 몸이 되었기에 구원을 받는 것이다. 문제는 그분이 주신 믿음에 의해 그분께 붙어 몸인 지체가 되었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24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 후에는 나중이라는 표현은 세 번째 단계의 부활이 있다는 말이기보다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최종적인 완성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의 세계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게 될 때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게 될 때이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이란 표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영적인 세력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에베소서 6:12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늘의 악한 영들의 정사와 권세가 이 세상의 주관자들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사상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들이 배후 세력으로 역사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것을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2:1-2)을 따라 살았다고 말한다.

 

요즘 선한 문화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이 잘못 주장하면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사탄이 대중문화를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러한 주장을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믿고 있고 또한 그러한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결코 성경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사탄이 대중문화를 선택하였다는 주장이 얼마나 말씀을 거스리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대중문화를 바로 잡고 사탄적인 것을 가려내어 그것을 선한 문화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 사탄이 벌이는 전략 중의 하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도는 신령한 자로서 신령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자들이나 목사가 구분을 해 주어야 아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으로 계시된 성경 안에서 주님의 뜻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으로서 왕 노릇하고 계신다. 그것은 자기 백성들을 성령으로 사로잡아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제압하는 왕노릇이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25,26).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친히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기에 만물 아래 매인 분이 아니시다.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7,28).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하는 표현인데 이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복종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는 다른 존재로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권위가 열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인 두 번째(마지막) 아담으로서 하나님께 복종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마지막 아담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게 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존귀와 영광은 최종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29절에 보면 바울 사도가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라고 기록하고 있다. 많은 주석들을 보면 이 구절을 가지고 난해 구절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실제로 난해한 부분은 없다. 왜냐하면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볼 때에 바울은 여기서 갑자기 죽은 자에 대한 세례를 정당화하면서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 문맥이 아니기 때문이다(바울 사도는 지금 세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부활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왜 이런 습관이 생기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당시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죽은 친구나 친척들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 일들이 성행하였던 모양이다. 바울 사도는 그러한 의식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예를 들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부활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라는 말이다.

 

결국 우리 성도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삶의 전체를 드리며 애쓰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성취되었고 그 주님의 부활 안에서 또한 성도의 부활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여기서 놀라운 선언을 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1).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이해하고 있는 부활이란 단순히 죽은 후에 내세에게 부활될 것을 믿는 신앙이 아니었다. 오늘 자신이 날마다 죽어지고 또한 주님 안에서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말이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날마다 과거와의 단절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날마다 우리 안에서 죄의 본성이 나오는 것 때문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자기 자신이 죽고 생명의 세계에서 다시 사는 경험을 가지는 자라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이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32).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당하여 원형 경기장에 던져져 맹수와 싸우는 그런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일 죽을 것인즉 오늘 먹고 마시며 마음대로 살자고 할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의 삶이란 미래에 부활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사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 안에서 죄인이 죽고 새롭게 태어나 부활의 세계에서 새 생명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4)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도 바울은 문제가 있는 교인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 하는 권면이 아니라 어떤 모습이 교회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전혀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부활 세계 안에는 본능적으로 죄와 상관없는 모습을 지니게 되는 삶이라는 의미이다(2001.10.7./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