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32.고린도전서 15:35-58 신령한 몸

불편한 진리 2015. 2. 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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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35-58

신령한 몸

 

신앙이란 결코 관념이나 이론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적으로 믿는다고 말만하면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십자가를 알고,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는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아는 것으로 관념적이고 이론적으로 안다는 것은 천국과 아무 상관이 없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천국이란 우리가 무엇을 아는 것으로 우리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주님이 넣어주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신앙이란 말 그대로 믿음에 관한 문제이다.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때 믿음에 관한 문제는 지식이 아닌 삶에 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의 삶이란 말이 따로 필요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음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고,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느냐 하는 것으로 한정시켜서 말해서는 곤란하다. 믿음이라는 말 속에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믿음이란 말은 행위와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이제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부활의 새 생명을 얻은 성도는 어떤 상태인가를 말하고 있다. 35절에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고 물으면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는 신령한 몸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44). 그렇다면 신령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이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면 신령한 몸으로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부활로 설명하면서 15장의 결론을 58절에서 이렇게 맺고 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몸이 되지 않은 자가 이 명령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령한 몸의 모습은 세상 일, 썩어지는 일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에 힘쓰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의 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을 가지고 주의 일=교회 일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일은 모조리 다 주의 일로 둔갑한다. 그러면서 목사의 말을 거역하면 그것이 곧 주님의 일과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코 그런 차원에서 주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주의 일이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자가 하는 일이다. 변화되지 않은 자는 결코 주의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변화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가? 변화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 여기에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마음대로 변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죄인이 자의로 변화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죽음을 극복하심으로 부활의 세계를 주셨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바울 사도는 39절 이하에서 하늘에 속한 형체, 땅에 속한 형체,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심지어 별과 별의 영광도 서로 다르다고 언급하였다. 영광이란 본질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모든 피조물이 제대로 본질이 드러남으로 모든 피조 세계가 어우러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이란 서로 어떤 하나의 일치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육의 몸은 육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과는 상관없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신령한 몸은 신령한 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모습으로 그 본질이 드러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령한 몸이란 하늘에 속한 자로 하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다(47-49).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15장 초두에서 이미 밝혔다. 우리의 힘과 노력에 의해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 죄는 사망으로 드러나고 사망의 쏘는 것 또한 죄다. 그래서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율법의 조항을 통해 죄인가 아닌가 하는 판가름이 나기 때문에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것이다(56). 어떤 인간도 이러한 율법의 심판과 사망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이란 우리 내부에서 만들어질 수 없고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나라가 주어진 것이다. 생명의 나라가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은혜는 입혀지는 것이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53,54).

 

앞에서 상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은혜는 먼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말씀이 믿어진 상태가 된 이 때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31). 죄로 말미암아 또 다시 육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죄의 본성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이러한 죄의 본성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십자가로 온전히 이루신 구속의 완성 안에서 살고 있다.

썩을 존재가 썩지 않는 존재로 이미 변화되었다.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으로 입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미래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될 것을 기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변화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또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변화될 것을 믿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51,52)라는 말씀을 미래에 이루어질 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성도는 자기 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거부하고자 하는 육의 몸이 날마다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 날마다 다시 사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에게는 마지막 나팔이 언제나 울려지는 것을 듣는 자이다. 말씀에 의해 죄의 몸이 죽고 날마다 신령한 몸으로 새롭게 다시 살아난 자로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지 세상 일에 힘쓰는 자가 아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5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의 일이란 단순히 교회의 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어떤 행사에 열심을 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상 주님을 위해 죄의 본성으로 똘똘뭉친 육의 몸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곧 주의 일에 힘쓰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시고 주님이 기다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적극적으로 자기 백성들을 장악하셔서 세상에서 죽음을 당함으로 이기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흔들릴 수 없는 것이고 주의 일에 힘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우리더러 주의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2001.10.14./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