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28.고린도전서 14:1-19 예언과 방언(1)

불편한 진리 2015. 2. 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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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1-19

예언과 방언(1)

 

본 장은 예언과 방언에 대한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바울 사도가 예언과 방언에 대한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있는 것은 예언과 방언에 대한 문제를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알려주려고 하는 의도라기보다는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문제를 중심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2장부터 은사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은사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가장 심각한 것은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기 때문에 13장에서 사랑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본 장의 초두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1)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다시 염두에 두면서 본 장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울 사도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공적 예배 시에 고린도 교회에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예언과 방언이란 공적 예배 시에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수단으로서의 은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수단으로서의 은사로서 예언과 방언은 말씀의 은사이다. 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된다든지(5,13,27) 혹은 가르친다라고 표현한 것이라든지(19,26), “온 교회가 함께 모여”(23)라는 표현, 차서를 따라서 하라는 말씀(27) 등의 표현들이 그것을 잘 이야기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언과 방언이란 오늘날 방언 기도를 받았다고 해서 이상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는 그런 의미의 방언이나 혹은 앞으로 신학을 할 것인지 아니면 사업을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점쟁이식의 예언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절을 다시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그러면서 2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덧붙이고 있다. 사랑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은사가 가장 큰 은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랑을 가지고 행하면 무조건 다 된다는 말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은사는 아무 유익이 없고 무의미한 은사이다. 은사의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주님의 몸을 세우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은사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은사가 아니라면 다 가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베풀어지는 은사를 행하려고 하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에 방언보다는 예언이 교회에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14장 전체를 통해서 볼 때에 바울의 입장은 방언을 경계하고 또 심하게 말하면 방언을 경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결코 방언을 경계하거나 경시하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는 방언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방언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며 사랑으로 잘 드러나는가 하는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은사에 대해서 언급을 하다가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로 집약된 이유는 모든 은사는 예언과 같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면 방언과 예언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2). 반면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3).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아무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유익은 있을 수 있으나 교회의 유익은 없다. 그러나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것이다(4).

 

그렇다면 남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왜 내리시는가?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창세기 11:1-9에 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을 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심판하시는 차원에서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이런 점에서 다시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우리의 죄악된 심성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는 죄악된 본성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듣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즉 방언은 심판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너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늘의 계시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방언은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보다 알아들 수 있는 예언을 하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물론 예언이든 방언이든 둘 다 유익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방언이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통역이 없는 상태로 함부로 행해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이란 흔히 말하듯이 앞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선포하는 것이 예언이다. 즉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질 모든 일들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것이 예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고 그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면 예언한 대로 맞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약속하신 대로 일하셨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그대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작정하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으로 반드시 다 이루시고야 말 것이다. 이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결국 예언이라는 것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앞 일을 누군가 말을 한다는 그런 차원으로서의 예언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점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앞 일에 대한 호기심이 있기 마련이다. 앞 일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미리 알아서 대비하겠다는 심보이다. 앞 일을 대비하겠다는 것은 주님을 믿지 못하는 삶인 것이 분명하다. 나의 개인적인 일을 하나님의 일에 개입시켜서 대비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대로 어떻게 일을 하시든지 상관없이 그분이 하신 일이기에 늘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좇아가는 삶이 성도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일하신 가장 결정적인 일은 십자가이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약속대로 일하신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대로 그대로 전하는 것이며 또한 어떤 고난과 어려움 심지어 죽음이 내게 엄습해 온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12절에 보면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이다. 신령한 것을 사모한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을 위해서 사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몸을 세우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자이다. 그러기에 방언을 하려고 하기보다 예언을 함으로 상대에게 말씀을 드러내고자 하는 삶으로 산다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모습이다.

바울 사도는 1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한다. 바울 사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말이다. 모든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는 이것이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9). 오늘날 예언과 방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계시의 정신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그 소망이 무엇이며, 하늘나라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또한 구원의 큰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언과 방언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이 모든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증거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언과 방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2001.7.22./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