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30.고린도전서 15:1-19 부활의 복음

불편한 진리 2015. 2. 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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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19 

부활의 복음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부활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활장이라기 보다는 복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장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어떤 장들을 특징적인 한 가지 주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랑장 혹은 믿음장, 부활장 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 때문에 우리는 장 제목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그 이상의 다른 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본 장은 부활 자체를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부활로 특징 지워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여기서 왜 갑자기 복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복음을 설명하되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일까? 고린도전서 1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고 하였고, 23절에서도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하여서 십자가를 복음의 핵심으로 말하였다. 오직 십자가만 전한다고 하였다. 바울 사도의 선포 내용을 한 마디로 십자가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2:2에서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미 앞에서 복음의 핵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가 여기서 굳이 또 복음을 설명하는 것은 이제까지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분쟁, 성찬, 은사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다룬 것은 그런 모든 것들을 고린도 교회가 바르게 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다시 복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이란 복잡한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대로라는 말씀이다. 성경대로 즉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대로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어떤 요청이나 수용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인간들은 그저 훼방꾼이었을 뿐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란,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제공하신 은혜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바울 사도는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바울 사도를 장악하고 있을 때에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8)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던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면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며 또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9).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 연결 고리를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1).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그 믿음 안에서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또한 오늘날 우리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3:22).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못난 자신에게까지 부활을 확증시켜주셨던 주님의 은혜 때문에 자신은 주님을 위해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어떤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가? 17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죄 가운데 거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을 죄에서 건져내신 역할을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죄에서 건져내셨다면 그것은 다른 세계이다. 즉 죽음이 초월된 새 생명의 세계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란 단순히 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없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가져오신 사건이다. 죄와 상관없는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신 것이 주님의 부활 사건의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1,2).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여 어떤 것을 사수하거나 혹은 율법을 지키듯이 지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 말은 믿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믿음이란 단순히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정도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가 믿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1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한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바울 사도의 전파나 그 전파를 듣고 믿게 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성도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하고 있고 또한 부활을 믿음의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복음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인 됨을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함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그들이 은사나, 분쟁, 시기 등의 문제에서 벗어나 다시 복음에 굳건히 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살아 계신 주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좋아하는 죄인의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믿고 따른다는 것을 나의 부활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그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성도란 병 낫는 것, 방언 하는 것,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 등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지금 여전히 살아 계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종교이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망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주님만 사랑하는 자가 된 것, 이것이 부활이다. 새로운 생명이 아니고서는 주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는 것이 복음인줄 알았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 부활 세계 안으로 들어온 이후 그는 자기를 위해 살던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 살아 계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음이고 그분만 증거 하는 삶이 복음에 이끌려 사는 삶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기를 위해서 살던 자가 주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된 것이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라는 것이다(8-11). 성도가 예수님을 만난 증거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의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죽음이 초월된 또 다른 세계, 즉 부활의 세계 안에 살면서 그 세계가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날마다 선포하고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초두에서 복음을 십자가로 설명하였던 것을 15장에서 와서 부활로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성도의 삶이란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세계 안에서 새 생명의 삶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부활 세계 안에서 볼 수 있는 새 생명의 모습이 아니었기에...(2001.9.30./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