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29.고린도전서 14:20-40 예언과 방언(2)

불편한 진리 2015. 2. 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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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20-40 

예언과 방언(2)

 

바울 사도는 본 장을 통해 예언과 방언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본 장을 통해 예언과 방언에 대한 우리의 모든 궁금증을 풀려는 시도로 이해하고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은사를 잘못 이해하여서 자기를 증명하며 서로를 질타하며 무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갔기에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은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함으로 교회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 하는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절에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지혜란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은사에만 강조점을 두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어도 방언을 말함으로써 계시된 말씀 자체는 생각하지 않고 은사에만 치중하여 아이들같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아이란 어른의 지배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즉 주님의 지배를 받은 모습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은사의 주인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시기하며 경쟁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악에 대하여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한다. 앞에는 아이라고 하였고 뒤에서는 어린아이’(갓난아기)라고 말씀한다. 즉 악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바울은 21절에서 구약 이사야 28:11,12 말씀을 배경으로 인용하여서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 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적으로 해이해진 모습을 가졌을 때 제사장이나 선지자란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능력을 다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28:11)고 말씀하시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무슨 신령한 말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인 앗수르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점령하도록 해서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들으며 살게 하겠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의 포로가 되는 징계를 받는다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은 알아들을 수 없는 앗수르의 말을 들으며 살게 되는데 앗수르가 이스라엘에게 말을 해봐야 그들을 압제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도움이 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구약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방언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말은 방언은 믿지 아니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표적이라는 것이다(22). 만약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라고 합니다. 여기서 무식한 자들이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심판의 차원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때문에 교회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 알아들 수 있는 예언을 말하는 것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책망이 되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유익 된다는 것이다(24). 그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만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25).

교회란 개인 개인을 단독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체로써의 주님의 몸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지체가 있다는 것은 각기 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다. 역할이 다르다는 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는 하나의 교회이다. 여기에 하나의 중요한 사안이 대두된다. 이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있는 문제를 의식하면서 26절에서 이렇게 먼저 선언하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교회로 모일 때에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도 있는데 이는 모두 계시의 말씀이 은사에 따라 다르게 드러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공적 예배 시에 누군가 방언이나 예언을 말하게 되거든, 아니 누군가에게 방언이나 예언이 주어지면 순서를 따라 하되 결코 많은 사람이 동시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27-29). 통역이 없는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하고 또한 방언이든지 예언이든지 하나님의 계시는 후에 주어지는 것을 받아야 한다고 바울은 덧붙이고 있다(30).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 고 선언하고 있다. 화평이란 인간에게 없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셨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의미도 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이 대신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남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화평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화평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가 사모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은사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화평을 드러내는 일에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땅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좇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날마다 연결되지 않는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기에 말씀을 좇지 않는 교회는 조직화 되고 문화화 되며 외형적인 건물, 재정의 풍부함, 사람 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한 마디로 물량적인 모임으로써 권력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가 늘 공급되고 성도는 그 계시를 사모하며 소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갑자기 34절에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등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 사도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문맥을 잠간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14장 전체는 방언과 예언의 문제를 다루면서 29-32절의 말씀은 예배 시에 예언을 통해 주어지는 계시의 말씀을 분별하는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34절 이하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34절에서 율법은 창세기 3:16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남자의 지배를 받는 위치가 되었다. 남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죄 아래 있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즉 그것이 죄인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지배하고 지배받으면서 죄 때문에 서로가 이러한 관계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에서 여자는 계시를 분별한다는 측면에서 잠잠함으로 남자의 머리됨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36,37)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여자 목사를 거부하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한 논지의 근거로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이제 결론을 내리면서 40절에서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다.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모든 것을 복음으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그것은 주님의 몸으로써 하나님의 화평을 드러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2001.7.29./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