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26.고린도전서 12:12-31 몸과 지체

불편한 진리 2015. 2. 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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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2-31

몸과 지체

 

본 장의 전반부에서 바울 사도는 은사란 한 성령,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임을 언급하였다. 12절 이하에서도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계속 이어가면서 한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한 몸임을 강조하고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12,13).

몸에 지체가 많이 있지만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한 몸이라는 것이다. 성도가 한 성령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곧 한 몸임을 의미한다. 한 성령에 의해 부름 받았으므로 성도들은 한 몸으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주님의 한 몸된 교회는 한 성령을 마신다. 여기서 한 성령을 마신다는 표현은 요한복음 6:53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한 성령과 연합되어 그분을 믿는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성도들이 다양한 은사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한 몸으로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성도 모두가 한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로 살며 또한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또는 종이든 자유자든 그것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즉 성령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민족이었느냐 혹은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과거의 방식이나 사회적 신분으로 은사의 차별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다 동일한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은사의 다양성이라는 것 때문에 서로 차별한다면 그것은 곧 성령의 은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은사가 특별한 어떤 사람들의 전유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은사를 발휘한다는 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이 각각의 사람을 통해 달리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 은사를 받은 자의 믿음이 다르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해서 한 몸을 이루고 한 몸임을 드러내는 것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4:11-12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기 때문에 은사는 성령께서 그 뜻대로 나눠주시는 것이고(11), 또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18) 주시는 것이다. 결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주시는 분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서 행해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흔히 교인들 사이에서 은사 이야기만 나오면 기가 죽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하다못해 방언의 은사라도 받았어야 다른 사람들하고 말을 할 때에도 무시를 당하지 않는데 자기는 아무 은사도 전혀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자격지심에 빠지는 경우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은사를 받기 위하여 밤새도록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교인들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은사란 주시는 분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은사를 받으려고 노력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받은 자는 받았다고 자기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25)라고 말씀하고 있다.

 

은사로 말미암는 분쟁이 있다면 은사를 주신 분의 취지에 맞는지 또한 그분께 근거한 행위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은사는 서로 돌아보게 하는 수단이다. 자기 잘난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통해 자신이 낮아지고 죽어지는 것을 경험함으로 나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6,27).

28절 이하에 보면 몇 은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첫째, 둘째, 셋째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은사가 무슨 서열이 있거나 혹은 첫 번째 은사가 중요하고 그 다음 은사를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각기 다른 은사로 다양하게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게 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서열의 높낮이나 혹은 차원이 높고 낮은 은사 내지는 중요한 은사 저급한 은사로 나누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31절의 말씀을 이해할 때에도 더욱 큰 은사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우선 여기에 사도, 선지자, 교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사도나 선지자 교사는 모두 가르치는 일로 세움 받은 자이다. 자기를 위하여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움 받은 것이지 자신이 사도이고 선지자이고 교사라는 것을 내세울 수 없다. 직임을 자신의 권위로 삼고 다른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이들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계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자랑삼을 뿐이다.

성령의 나타남이 다양하게 있는 것이 교회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일하신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화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는 의미로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일하심은 서로에 대한 부족함을 메워가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몸을 드러내시어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다양성 자체를 인정하고 성령의 일하심에 복종하는 성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여기서 더욱 큰 은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은사에 우월이 있다는 개념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고서는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는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은사들이 시행되는 제일 좋은 길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으로 은사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자기 자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큰 은사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시행되는 은사가 더욱 큰 은사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 시행되는 은사는 모두가 다 큰 은사이며 사랑으로 시행되지 않는 은사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의 심각성은 분파주의였다. 분파로 인해서 발생한 분쟁, 경쟁과 시기였는데 그 모든 원인은 자기네들의 지식과 지혜 은사 문제 등에 있어서 자기를 낮추지 못하고 자랑하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가 할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의 마음에 동참하는 희생과 봉사와 섬김을 이루는 사랑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은사 문제도 사랑이라는 라인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할 수가 없다. 분쟁과 경쟁은 차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지체란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몸에 붙어 있을 때에 의미가 있다. 서로서로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가 제대로 드러날 때에 몸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손이 손의 역할만 잘한다고 해서 몸이 몸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눈이 눈의 역할만 잘한 다고 해서 몸이 제대로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몸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각 지체들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이다.

각 지체들이 서로를 세워준다는 것은 서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몸을 드러내는 역할이라는 점이다. 이 관계를 바울 사도는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런 점에서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29,30)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다 똑 같은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상대방에게서 은사를 드러내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보고 주님을 보며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알고 죄인 됨을 고발 받는 측면에서 은사가 주어졌음을 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은사들 때문에 더욱 온전한 은사를 행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2001.7.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