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27.고린도전서 13:1-13 사랑

불편한 진리 2015. 2. 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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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1-13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은 흔히 사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13장은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가 베풀어지는 통로로서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은사에 대한 문제라는 말이다). 사랑이 은사 중의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은사가 행해지는 모습이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생각하려면 요한일서를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된다.

고린도전서 12:31에 의하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였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큰 은사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제일 좋은 길을 통해 행해지는 은사가 더욱 큰 은사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13장을 말함으로 은사가 성령의 나타나심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분명히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수많은 문제들이 근본적으로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파를 나누어 분쟁하고 싸우는 문제도 사랑의 마음을 따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온전히 합하지 못한 것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고전 1:11). 교인들끼리 서로 싸우면서 세상 법정 앞에 서는 것도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며(고전 6:12),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하면서 신전에 들어가 귀신의 잔과 떡을 먹으므로 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것도 사랑이 없기 때문에 발생되는 문제이다(고전 8:1). 남보다 탁월한 은사들을 소유하려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결국 그들 사이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1).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얼마든지 물질적인 지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약한 형제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고전 9:22).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는 선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다(고전 11:1).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셨으며 십자가에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3:16).

 

그러므로 우리가 본 장을 이해할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랑으로 사셨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면 우리에게서 이러한 사랑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장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은사가 주어짐으로 우리에게서 성령의 나타나심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대조하고 있는데 어쩌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방언을 천사의 말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사람의 방언이든 천사의 말이든 사랑이라는 길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지껄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서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며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2). 여기서 믿음이란 어떤 기적을 나타내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큰 능력을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에 불과하다. 또한 구제를 행하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3).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고귀한 사랑으로 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 여전히 자기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울 사도는 1-3절에서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공통적인 말을 언급하면서 사랑이 없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없는 은사는 신령한 것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름다운 말을 찾는 것이 아니며, 예언하는 능력이나 산을 옮기는 믿음을 찾는 것도 아니고, 내게 있는 모든 것, 심지어 내 몸까지 불사르는 열정을 찾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있는가를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도는 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을 늘 보여주면서 사는 자가 성도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은사를 통해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되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흔적이 나에게 있음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기 위해서이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졌다. 십자가를 알고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나 그 고백은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것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것을 찾으신다. 따라서 우리가 보여야 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4-7절에서 부정적인 차원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다.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는 사랑이란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인간의 사랑과는 관계없다는 뜻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땅의 사랑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사랑은 자기 사랑이고 또한 자기 사랑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기에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죄인에게서 자기 사랑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사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무엇이 교만이고 무엇이 무례함이 되며 어떤 것이 불의인지 모르며 무엇에 성내야 하고 무엇에 안내야 하는지를 모르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기준이 없는 자들이다. 그 기준은 오직 자기중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만이 오래 참게 되고 온유하게 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되고 투기하지 않게 되며 자랑하지 않게 되고 교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무례히 행치 않게 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게 되며 성내지 않게 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게 되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참게 되는 것이다.

 

8절 이하에서는 잠시 동안 세상에서 유지되는 것과 영원한 것을 언급함으로 성도는 오직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다. 은사는 부분적인 것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 어린 아이가 하던 일은 어른이 되면 버리게 되듯이 결국 세상에서 잠시잠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온전한 하나님 나라에서 무의미한 것들이기에 날마다 버리는 작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10,11).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 소망, 사랑이다(13). 이 세 가지는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다(13). 제 일이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이 제일 낫다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5:5,6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한 말씀이나 데살로니가전서 1:3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믿음과 사랑, 소망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

믿음과 소망이 사랑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차원에서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랑에 의해 표현되고 행해지지 않는다면 믿음, 소망은 가짜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본 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랑은 예수님이 가장 완전하게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고 주어진 은사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결국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주님은 하늘로부터 온 이러한 사랑으로 행해지는 은사인가를 물으시는 것이다(2001.7.15./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