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
고린도전서 3:10-15
하나님의 집
고린도전서 3:9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했다. 밭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3:1-9의 말씀에서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 이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는 것을 통해 설명했었다. 고린도교회는 지도자를 따라 파당을 지었는데 그들을 향해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은 바울 자신이나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9절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는 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 하므로 자신을 하나님의 집 터를 닦는 건축자에 비교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닦은 이 기초 위에 집을 세우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바울 자신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터를 닦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따라’ 터를 닦는다고 했다. 바울 서신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라고 표현한 것은 대체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했던 ‘사도직으로서의 부르심’을 지칭하는 말이다(갈 2:8,9, 롬 1:5, 15:15 참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도직 때문에 전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에 사도직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은혜가 우선하는 것이지 직분 자체가 우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직분이 없으면 봉사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아니 직분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온갖 직분들을 다 만들어서 전교인들을 간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직분이 마치 계급처럼 되어버렸고, 직분이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을 ‘설친다’ 혹은 ‘나선다’라고 하면서 무시하는 것이다. 성도로 하여금 주님의 일에 순종하게 만드는 것은 직분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은혜여야 한다. 인간의 친목 단체는 직분으로 일하게 하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가 일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자 하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1절).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의 터를 닦는 것은 오직 사도들에게만 주신 은혜이다(엡 2:20).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기준(모퉁이돌)으로 하여 교회의 터가 되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였던 것이다. 이제 완성된 이 터 위에 모든 성도들은 건물로 짓는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무슨 재료를 써서 건물을 세우느냐를 말한다. 12-13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을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치 있고 가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이것을 오해해서 교회에서도 가치 있고 가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자기 생각에 가치 있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에서 나오는 가치이지 절대적인 가치, 즉 주님이 보시는 가치 기준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불에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있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과 세상에서는 가치 없게 보이더라도 하늘에 쌓는 보물이 되는 것, 즉 영원한 나라에까지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되어진 일들, 즉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 되어지는 일들 그것이 곧 영원한 나라에서까지 가치가 인정되는 귀한 보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힘과 재능을 기초로 해서 자신의 역할,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따진다면 그것은 언젠가 주님의 심판에 의해 몽땅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신을 기초로 해서 한 것은 세상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의 눈에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주님의 심판 앞에서는 다 타버리고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결국 바울 사도는 이 본문을 통해 상급의 차등에 대한 근거를 이야기하고 인간이 얼마나 노력을 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였는가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주님 자신의 것을 반드시 찾으시고 인간이 행한 모든 것들은 모조리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나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에서 가치 있게 보이는 것을 좇아가면서 사람의 일에 빠지는 모습이 철저히 주님과 상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14,15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너무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 구절이다. 아니 한국교회 대부분은 이 말씀을 상급의 차등이 있다는 말씀으로 오해하고 있다. 앞의 구절들이 바울 사도가 상급의 차등에 대한 근거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 대하여 우리는 상급에 대한 차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였는가를 묻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 상급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만 상급이란 상과 구분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성도가 받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했다(롬 3:22). 그렇다면 구원에 차별이나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한 몸의 지체로서 다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지 그리스도의 의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부요한 자가 되었는데 우리의 행위로 하늘나라에서 부요하게 되고자 하는 자는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마지막 때에 불이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가를 시험하는데 거기에 타버리는 것이 있고 남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불이란 따로 불로서 시험한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심판 그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다. 심판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터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다. 인간의 공력은 모두 타버리고 만다. 즉 불 속에서 남는 것은 모두 주님의 것만 남지 인간의 것은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자신의 공력으로 자랑했던 것이 다 타버릴 때 세상의 것을 내세웠던 자신의 부끄러움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학력, 지방색, 직책, 권세, 명예, 교회라고 하는 조직체 이 모든 것들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뿐이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무의미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 오실 때를 대비해서 그렇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것들을 의미없는 것으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삶이어야 한다.
결국 자신의 구원이 자기의 공력이 아니라 모두가 주님의 힘인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터고 우리는 그 터 위에 집을 세우는 자라면 우리는 터의 운명과 같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안에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 목숨을 주러 왔노라”(막 10:4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기초이다. 이 기초 위에 우리라고 하는 성도들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섬기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니라면 모두 불에 타버릴 인간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001.2.4/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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