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
고린도전서 3:1-9
자라게 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빌립보서 2:5-8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자신을 비어 종의 모습이 되는 것이고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종의 자세를 가진 자로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죽어도 상관이 없는 자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자가 바로 육에 속한 자가 아니라 신령한 자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두 종류의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이다. 흔히 고린도전서 2:14-3:3에 연계하여 세 종류의 사람을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2:14)과 신령한 자(2:15), 그리고 육신에 속한 자(3:1)로 구분한다. 신령한 자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사는 자이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는 알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신앙인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처하고 있는 상태를 세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는 곳은 없다. 주님께서 보시는 인간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이 두 상태 외에는 없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성숙하지 못한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믿어진 자라면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의를 누리는 한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롬 3:22).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육신에 속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지만 성숙하지 못한 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라고 단언하고 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절). 그래서 이런 자들에 대하여 어린아이들을 상대하는 것과 같이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들어가서 복음을 선포할 때 그들은 육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여 그들이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들에게 십자가에 대한 깊은 것을 가르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밥 같은 단단한 음식을 먹일 수 없었고 십자가의 복음을 쉽게 설명하여 줄 수밖에 없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어린아이인 그들에게 젖으로 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풍성한 은사 속에서 영적으로 성숙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증거를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3,4절). 고린도교회 일부 사람들이 육신에 속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바울파,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서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육신에 속한 자는 자신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알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행하며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사람을 좇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령한 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늘의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땅에 있는 교회의 모습은 이 두 종류, 즉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들이 대조되면서 나타나지만 주님은 주님 자신의 참된 몸으로서의 교회로 세워 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이야기하게 될 때에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 저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할 게 아니라 반드시 성경에서 교회에 대하여 뭐하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시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육에 속한 자라고 말하는 바울의 말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주성교회가 주님의 교회라는 전제 위에서 볼 것이 아니라 주성교회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일치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진정으로 주님의 몸으로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가?
고린도교회에 시기와 분쟁이 생기게 된 것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으로 지도자를 따라 파벌이 형성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5절)고 밝히고 있다. 주님 앞에서 주님의 일에 대하여서는 아볼로나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도 아볼로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는 사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아볼로나 바울 자신은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물을 주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 6,7절에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했다. 바울이나 아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심은 자이고 물을 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교회가 드러내어야 하는 분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만 높이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그렇다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것은 이미 1장과 2장에서 밝혔듯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고 자랑하는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성장병’ 혹은 ‘교회부흥병’이라는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 목회자는 ‘목사직업병’에 걸려 있다. 이제까지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는 원인이 교회 안에 일어나는 시기와 분쟁이 원인이었다고 본다. 외부에 교회를 자랑하고 목회자를 자랑해야 화목한 교회요 훌륭한 목회자가 있는 교회로 생각하고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회자를 자랑하고 교회의 조직체계와 외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전도라고 착각하고 있다.
교인수가 늘어나고 부흥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한다. 사회 사업도 좋고, 가정 사역 운동도 좋고 제자 훈련도 좋다. 어떤 방법이든지 교회를 성장시켜주는 일이라면 성경의 어떤 구절이라도 끌어들여 성경적이라는 합리화를 시킬 수 있게 되었다. 목회자는 자기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를 이미 주님의 몸된 교회로 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성경적인 교회란 어떤 모습이어야 되느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주님의 교회를 부흥시키고 많이 전도하면 그 속에서 알곡도 많이 생길 것이라고 하는 충성심이 왜 잘못되었느냐고 반문하면서 교인수를 모으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마귀의 전략에 매수된 것이다. 주님의 일이란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만 십자가 안에 거하도록 하는 것이다(요 6:37-39).
8절에 보면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한다. 사람들은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다’는 말을 세상에서 일한 것만큼 상을 준다는 말로 오해하고 있다. 즉 상급에 차등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상급에는 차등이 없다. 상은 있지만 그 상에 대한 차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각각 자기가 행한 대로 받을 뿐이다. 일하는 대로 받는다는 것은 많이 하면 많이 받고 적게 하면 적게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맡겨진 일이 무엇이든 그 일에 충성했을 때 상이 있다는 것이다.
심는 것과 물주는 것은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 따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 내의 직분의 차이도 다양한 형태에 있는 것이지 권위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바울파, 아볼로파라는 것이 전혀 의미 없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만 높이는 자가 신령한 자이며 상을 받는 자이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주님이 시켜서 하게 되고 그 일을 통해 자기 기쁨을 찾는 자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자체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9절)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동역자’란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밭’이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터라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고, ‘집’이란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가 된 건물로 하나님이 거하시며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되는 거처라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나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점에서 감사할 일이다(2001.1.2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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