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
고린도전서 3:16-23
하나님의 것
바울 사도는 3:9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지칭했다. 하나님의 집이란 구약적 표현인데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전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성막 제도를 주신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에 의해 처음 지음 받은 인간은 땅을 다스리고 땅에 충만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창 3:5,6).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자격이 박탈되었다.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는 것에 충실하였던 것이 아니라 하늘을 넘본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죽음과 저주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다. 저주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동경하는 것은 하늘이었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다.
하늘은 땅의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다. 하늘이 죄인을 용납할 수가 없다. 죄인은 하늘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약속이라는 것을 주시게 된다(창 3:15). 그 약속은 여인의 후손이 나타나 사탄의 머리를 밟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을 보내시기까지 여인의 후손에 대한 계시를 주시기 위하여 땅에 어떤 통로가 되고 장치가 되는 것을 주신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성전 중심으로 살았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것으로 그들은 구원이 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잘못을 책망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신다. 그리고 ‘내가 곧 성전’이라고 밝히셨다. 눈에 보이는 성전의 의미와 그 성전에서 드려졌던 제사의 의미와 모든 율법의 의미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보이는 것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성전이나 율법을 통해 주신 모든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더럽고 악한 세상에서 거룩한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미 성도들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특징화시켰다(고전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고 선언했다. 여기서 성도들을 하나님의 집 또는 성전이라고 할 때에도 바울 사도는 어떤 구조나 건물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교회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서 말하는 것이다.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상징되듯이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몸으로서 주님이 사시는 것이다. 주님이 거하시는 곳으로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것은 거룩성이다. 그래서 17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 즉 율법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손상하는 것은 멸망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아직도 한국교회는 예배당 건물에 성전이라고 이름 붙이고 거룩성을 부여하고 있다. 설교하는 강단을 마치 지성소인양 오해하게 만들고 함부로 올라가서는 안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온전한 성전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그분의 지체가 되어 성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 자신의 거룩성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 안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주님의 본질적인 거룩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파당을 짓고 자기 은사를 자랑함으로 인간의 자랑거리만 난무하고 있었다.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원인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신 복음을 따르고 말씀에 복종된 상태가 되지 않고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으니라”(20절).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알 수 없고 할 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이 아니고서는 신령한 일을 알 수 없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고전 2:13). 성령이 아니고서는 주님의 일이 될 수 없다. 성령께서 그 성도를 성전 삼아서 일하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일에 자기의 지혜와 재능을 가지고 뛰어들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손상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는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지혜를 추구하지 말고, 또 사도들을 세상적 지혜의 선생 정도로 생각하지 말고 차라리 세상에서 무식하다고 무시당하는 바보가 되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자가 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자가 성도이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18절).
여기서 바울 사도는 구약 성경 욥기 5:13과 시편 94:11을 인용하여 세상의 지혜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 세상의 지혜를 허무한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허무한 것으로 보신다는 것은 오늘날 성도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 인간의 것, 세상의 것은 바울 사도가 이미 선언한 바와 같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불타 없어져 버릴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늘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그러면 21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지도자들의 특징을 치켜세우고 그들을 중심으로 분파를 조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치켜세우던 교회 지도자들은 사실 그들을 섬기고 봉사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들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 너희의 것이다”(22절). 이 말은 교회에서 가르치도록 세움을 입은 자들은 성도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르치는 자를 위해 성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도라면 모두가 다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3절)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는 자랑과 함께 한다. 아니 자랑을 하게 되어 있다. 세상의 지혜는 물질과 반드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먹고 산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이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은 세상의 지혜를 가르치는 자와 달리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고백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시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삶과 죽음,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위에 주가 되셨으므로 그의 백성이요 성도들인 우리들도 더 이상 세상의 종도 아니고 죽음에 매여 사는 자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성도는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생각하거나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는다. 즉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에 매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성도는 이 땅에 우리 자신의 영구한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세상에 하늘의 사고 방식과 하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보여주면서 세상을 심판하는 자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음 받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대속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지는 것이다(2001.2.11/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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