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
고린도전 2:1-5
십자가
하나님의 지혜는 지금 세상 사람들의 눈에 거리낌과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십자가로 나타났다. 그것은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바울 사도도 종으로서 자기 희생의 길을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본질을 가리지 않기 위하여 인간적인 언변이나 웅변술 또는 말의 설득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만 의존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 17:16-18).
바울 사도는 아덴에서 철학자들과 많은 변론을 하게 된다. 그 중심점은 ‘예수와 또 몸의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 17:32-34)고 했다.
철학자들과 변론하면서 바울 사도가 이야기하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롱도 하고 다시 듣겠다고 하면서 바울을 떠났다고 했다. 바울의 사역이 실패였느냐 아니었느냐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전도란 주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철학으로 변론하고 강론을 하였을 뿐이었다. 그 때에 그 전함을 통해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일을 통해 고린도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될 때에 아마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도행전 18:5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18:11에 의하면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묘사하고 있다. 아덴에서 부활이라는 논지를 가지고 변론했던 바울은 이제 고린도에 복음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아덴에서 있었던 일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지만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한다고 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이 부활을 무시하거나 부활에 대한 사실을 전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 사도의 생각 속에는 십자가가 중심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했다. 바울이 전한 것은 바울 자신의 지식이나 구변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지혜인 철학도 아니었다. 바울이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였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한 마디로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2절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말은 오직 십자가만 배우고 나머지 세상 것은 전혀 배우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무엇을 해도 십자가의 정신으로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것이 전도라고 말하면 흔히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해도 상관이 없는가?’ 라고 묻는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전도, 봉사, 헌금, 예배, 기도 등등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정신으로 하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헌금이든 봉사든 전도든 예배든 기도든 모든 것을 십자가의 정신으로 하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14에 의하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은 자랑할 것이 십자가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미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고 또한 세상이 자신을 대하여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고 했다. 성도란 이미 주의 영을 받은 자이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주의 영이 세상의 것을 거스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산다는 것으로 인해 늘 세상의 지혜와 충돌을 일으키면서 살 수밖에 없다.
이 말이 세상과는 거스리기 때문에 늘 세상과 시비걸면서 싸우고 불화를 일으키라는 말이 아니라 성도의 삶 자체가 세상과 일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십자가가 이러하기 때문에 성도는 고난을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 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는 말은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세계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다.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인간 세계에서 이해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늘에서 벌이신 일이기 때문에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소위 전도라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3절에서도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 말한다. 그런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바울의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감언이설로 유혹하는 것을 가지고 전도라고 하지 않는다. 전도하기 위해서 설득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설득에는 인간의 언변이 개입된다. 전도를 설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설득력에는 인간의 말재주만 있으면 되지 하나님의 도우심은 필요치 않다. 그러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의 선포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 이 말씀을 근거로 온전히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려면 이미 준비된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령께서 그 시간에 말할 것을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교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자 하는 그것이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고 일하심을 막는 처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논리적인 철저한 설교 준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오직 인간적인 웅변술이나 논리적인 설득력의 차원에서만 제한시키고 또한 그런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세상적 태도에 있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근거한다는 또 다른 차원을 망각하고 그의 복음을 헬라의 지혜 교사들이 전하는 세상 지혜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사람의 지혜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만드신 것은 철저히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5절)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종교들은 모두가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을 지닌 조직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에 사로잡힌 자는 종교 의식에 치중하면서 살지만 십자가에 사로잡힌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 뿐이다(2000.12.17 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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