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74.누가복음 23:39-56 십자가에서의 죽음

불편한 진리 2015. 1. 1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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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39-56 

십자가에서의 죽음

 

예수님은 십자가을 향해 죽으러 가시면서도 여전히 당당한 하늘의 권세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언약하신 대로 이루고 계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묶여 있었지만 권세는 전혀 묶여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롭게 자기 권세를 행사하고 계셨다. 그 권세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39-42).

 

십자가의 양 옆에는 두 행악자가 달려 있었다. 그중 한 행악자는 예수님을 향해 비방하기를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한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어있는 죄패를 보았을 것이다. 십자가에 처참한 상태로 달려 있다는 것이 메시야로서의 매력은 전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같이 고통 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비난할 수 있다는 것에서 죄에 대하여 얼마나 용감한지를 보여준다. 죄인이란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며 자기 구원에 집착하는 존재인가?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주님을 비방하는 존재임을 여기서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한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를 오히려 꾸짖으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구한다. 한 행악자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의 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같이 죽어가는 마당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구하였다는 것은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였던 것이다.

이 행악자가 주님의 나라를 구하였다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린 결과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 받는 보응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며 예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였다.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주님을 의인으로 인정하는 이 모습이 바로 주님 나라의 백성다운 모습이다. 이런 자에게 주님의 나라가 주어진다.

 

주님의 나라는 우리가 구한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넣어주셔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주님의 권세에 달린 나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4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여전히 왕의 권세로 말씀하신다. “오늘이란 지금이라는 의미이다. “낙원이란 창세기에서 최초의 사람이 잃었던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다. 선악과를 먹어 범죄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그리고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동편에 있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도록 하셨다(3:24). 길이 있고 그 길을 막아 지키도록 하셨다는 것은 언젠가 하나님 편에서 여시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언은 단순히 한 행악자를 향한 구원의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낙원의 길을 열었다는 언약 성취의 선언이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왕적인 권세를 가지고 메시야로서 함께 거하게 되는 나라가 죄인들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님은 두 행악자들 가운데서 여전히 자기 권세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이처럼 십자가의 은혜는 자기를 구원하라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과 주님의 의를 인정하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44-45).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제육시부터 제구시까지란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를 의미한다. 단순히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표현하지 않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라고 이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에게 있어서 빛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고, 어두움은 타락한 인간과 사탄의 힘을 의미한다(1:78-79, 2:32, 13:47, 26:18, 23 ). 특히 22:53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잡히신 상태를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이 임박한 상태를 한낮의 빛을 뒤덮는 어두움의 기세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움이 임하였다는 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탄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다음 징조, 즉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통해 사탄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포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 인위적인 것이나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고 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나타난 성소의 휘장이 지성소의 휘장인지 아니면 성소의 휘장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평범한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메시야로서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0:19-20).

 

이제 구약의 제사 시절 때와 같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동물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쥐고 있는 종교적 기득권과 성전에 대한 헛된 신앙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4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마지막에 해당된다. 이것은 시편 31:5에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을 인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였다는 것은 예수님 생애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결코 사람들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대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만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의미이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47-49).

 

누가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만 의인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 백부장의 증거를 기록하고 있다. 로마의 군병들을 거느린 장교의 증거 그리고 여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누가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소외된 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그들이 멀리 서 있었다는 것은 아직 연약한 모습으로 지켜만 보고 있을 뿐임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공회 의원인 요셉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반박이요 반전을 표현한 것이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50-5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비록 드러나게 예수님을 좇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요셉의 등장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마태복음 27:57에 보면 부자 요셉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사야 57:9에 보면 이런 말씀으로 예언되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자기 백성들을 통해 일하는 권세를 드러내고 계셨다. 예수님을 죽이도록 결정된 것이 산헤드린 공회의 만장일치에 의한 결의가 아님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은 실로 죄 없는 분이요 의인이라는 사실이다. 이방인, 여자, 공회 의원을 통해 증거된 예수님의 의로움, 메시야되심 이 모든 것들은 십자가에서 홀로 일하신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 나온 것이고 거기에 굴복된 결과일 따름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