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75.누가복음 24:1-12 예수님의 부활

불편한 진리 2015. 1. 1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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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1-12 

예수님의 부활

 

본문은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발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매장되던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을 찾아가려고 작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3:55-56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이 되기 전에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를 원했던 마음을 평소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그녀들은 그 무덤과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자세히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연민의 정이 여인들로 하여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으로 향하게 하였을 것이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1-3).

 

여기서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표현은 본다는 말이 아닐까? 돌이 옮기운 것을 보았고, 또한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누가는 여인들이 목격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단지 보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여인들이 확인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주 예수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의 사건에 대한 반전을 누가는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즉 성전 지도자들이 힘과 종교적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실패한 메시야 아니라 성전 지도자들이 원했던 것과는 아주 상반된 입장에서 도리어 예수님이 가 되셨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조함으로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4-6).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관심사는 오직 향품을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는 일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하여 부활하셨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당황될 뿐이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난 것이다. 천사가 말한 첫 마디는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하는 것이었다.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면서 과거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상기시키는 언어로 여인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주지시킨다. 누가복음 20:38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이 말씀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가의 하나님이시기에 죽은 자라면 살려내서라고 상대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천사는 여인들이 아직 죽은 자를 상대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즉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곧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한 인간을 죽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죽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들을 여인들에게 기억나도록 하였다. 계명을 좇아 쉬는 여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죽은 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 본다면 죽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언제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실을 인식하고 그 사실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빈 무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천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선포하고 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7).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다(9:22,44). 여인들의 관심사는 죽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것, 즉 죽은 자에 대한 것이었지만 천사들은 그녀들의 관심사를 산 자에게 돌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녀들의 관심사를 돌리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 말씀대로 이루셨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자의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언제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지 빈 무덤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다. 증인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즉 증인이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어떤 사실을 증명함으로 그 사실에 대하여 확실하게 인지시키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말씀을 말씀대로 선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역사적 사실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것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증인이 선포해야 할 말씀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다보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학으로 예수님을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가? 과학으로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를 설명할 수 있는가? 결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그것이 마치 교회의 할일인 것처럼 과학적 증명을 해 내려고 한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에 관한 문제이다. 믿음은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선포를 이루는 것에 대하여 누가는 제자들을 사도라고 언급함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8-10).

 

여인들이 기억한 것은 빈 무덤이 아니었고, 천사들이 상기시켜준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사도들에게 증거하였다. “사도들에게 증거하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누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사도들이라고 기록함으로 앞으로 주의 성령을 통해 나타날 교회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에베소서 2:20에 의하면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고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라고 하였다. 이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는 선포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알렸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포할 교회 공동체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하심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11-12).

 

사도들은 일단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것으로 들렸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20:6-9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무덤을 보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베드로가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믿지 못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믿었으되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어느 누구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이 일을 홀로 친히 말씀대로 이루셨다는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자는 없었다. 사람들의 무지는 이러하였다고 누가는 폭로하고 있다. 모두가 다 성전 지도자들의 권력에 놀아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는 죄인이라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무능한 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성전 지도자들의 권력에 붙잡혀 계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실로 놀라운 하늘의 권세로 자기 백성들을 남기고 계셨다. 한편 강도, 이방인 백부장, 여인들, 공회에서 찬성표를 던지지 않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 등이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권세로 십자가에 굴복시키신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일하신 결과로 주님을 믿는 자들이 남겨진 것이다.

주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그 하늘의 권세로 자신의 몸된 교회를 통해 자기 백성을 반드시 남기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누가복음에 등장한 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백성들을 남기시되 세상적 방식으로가 아닌 언제나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의해 이루신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