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72.누가복음 23:13-25 빌라도의 재판

불편한 진리 2015. 1. 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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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13-25 

빌라도의 재판

 

예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자들은 과거에 어떤 관계였든지 상관없이 당일에 서로 협력하는 친구 관계가 되고 있었다. 과거에는 비록 서로 정치적인 라이벌 관계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처단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되고 연합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죄인들의 본심이다.

이러한 죄성은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재판하여 죽이고자 하는 성전 지도자들에게서, 그리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로마 정부와 관련된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곧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성이라고 성경은 지적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세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재판은 불법적이고 불의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통해 성경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은 결코 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당시 사회의 정치, 종교 권력은 예수님을 유죄로 몰고 간다. 죄 없는 예수님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 누가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죄 없음이다. 빌라도는 결코 예수님에 대하여 단죄하고 싶지 않다고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정치적으로 출세하기 원하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때려서 놓는 것에 대해 용인해 달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13-16).

 

여기서 때린다는 말은 채찍질을 의미하는 말이다. 아마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경고를 주는 것으로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빌라도의 타협안은 오히려 더욱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도리어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18-19).

 

바라바에 대하여 누가는 민란을 주도하고 살인한 자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누가는 민란을 주도하고 살인한 자를 석방하라는 요구를 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모습인가를 은연 중에 묻고 있다.

본문에는 죄수를 놓는 것에 대한 배경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27:15-18에 보면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무리들, 아니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선택은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였다. 유대인들이 의인이신 예수님 선택하지 않고 죄인인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바라바와 같은 존재임을 누가는 폭로하고 있다. 그들의 판단은 바라바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바라바를 의인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원하지 않는 인간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 역시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상대가 싫지만 예수님을 거부하기 위하여 원수 관계일지라도 친구로 지내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의 죄악이다. 바라바를 선택하게 된 실상을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밝혀주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27:20).

 

대제사장과 장로들, 즉 한 마디로 성전의 지도자들이요 유대교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일을 일방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무리들은 소요하고 있었다. 그들의 경건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자 하는 쪽으로 몰아붙인다. 우리의 잘못된 종교적 열심과 경건이 얼마든지 예수님을 모독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20-21).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자가 바라바와 같은 죄인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무죄한 자를 죽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십자가에 죽어야 할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은혜이다.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고자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바라바는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게 된 자이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지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죽어야 할 자가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밝혀주는 셈이다. 대속의 은혜, 그것은 우리가 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방적인 은혜이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22-23).

 

계속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무죄를 주장하면서 놓아 주기를 원하였지만 그때마다 무리들 아니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를 원하였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 없다고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무리들 역시 그때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를 원했다. 이로써 누가는 예수님은 완전히 무죄하다는 것을 철저히 강조하고 있다. 실로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시다.

이와 동시에 죄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누가는 또한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헛된 자존심과 종교적 욕심이 어울어져 예수님을 어떻게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십자가에 죽여야만 지성이 풀리는 흉악한 존재인지 철두철미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미 앞에서 밝혔던 바와 같이 죄가 문제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가룟 유다를 사로잡고 있는 사탄이 이 모든 일을 강하게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어두움의 권세에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어두움의 세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께서 자신을 내어 맡긴 권세가 어떤 권세인지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23절에서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빌라도는 이들의 요구에 좌절하고 만다. 결국 로마의 정치권력도 유대 종교의 세력에 무릎을 꿇고 만다. 어떤 정치적 권력으로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고자 하는 일을 방해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24-25).

 

무리들, 아니 성전 지도자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 내려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보여주고 있다.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것이 두려웠다. 이것이 빌라도의 본심이었다(27:24). 이를 통해 빌라도는 로마의 법질서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편의를 추구하는 로마 제국의 연약성과 불법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결국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인간은 자신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하여 산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이게 되는 것이 죄의 권세 안에 사로잡혀 있는 처참한 인간의 실상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십자가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계속 제시된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약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저희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죄를 보여주고 의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