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70.누가복음 22:54-71 공회에서의 심문

불편한 진리 2015. 1. 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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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54-71 

공회에서의 심문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인가? 오늘날 여기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해야 하는가? 이러한 논의는 어쩌면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지만 사실 성경을 어떤 초점을 가지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의 차이는 엄청나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핵심을 가지고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것이냐 아니면 부활에 대한 것이냐 하는 문제로 압축 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자는 입장에서는 고난과 죽음에 관한 칙칙한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 접고 부활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소망을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지 않고 부활을 논할 수 없다. 모든 종교에서 경전을 중요시한다고 말하지만 특히 기독교는 성경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모든 메시지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면서 신약에서 최종적인 정점이 십자가 사건에 머문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경의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는 본질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십자가 사건으로 인도되는 예수님의 재판에 대하여 주목하게 된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재판에 대하여 3중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산헤드린 공회, 빌라도, 헤롯 이렇게 행해지는 재판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을 생각하지 않고 누가복음 22장 이하를 빨리 읽어 마무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의 지도자들에게 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가게 된다. 요한에 따르면 그 집은 안나스의 집이다(18:13). 베드로는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갔다.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54).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다는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지금 베드로의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따라 갈 수도 없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정쩡한 태도는 곧장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진행되는 예수님에 대한 심문은 5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어두움의 권세가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에 대한 성전 지도자들의 적의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도가 그 목적을 거부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 뜻대로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들의 죄악이다.

예수님에 대한 산헤드린의 심문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적의가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는가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성전을 이용해 자기 이득을 챙기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던 것들이다. 성전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지적하셨던 것들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갔다가 한 비자가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55-60).

 

대제사장의 뜰에 혼자 고립된 베드로는 세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라는 추궁을 받는다.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완벽하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부인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이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는 기록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34).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61-62).

 

베드로가 통곡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닭 울음소리 때문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인가? 그 원인은 닭 울음소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 돌연 주께서라고 표현함으로 베드로가 부인하게 되고 또한 통곡하게 된 이 모든 일들에 있어서 주도권은 여전히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돌이켜 후에 형제를 굳게 하는 주님의 일에 동참되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죄를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반성차원이 아니라 실패한 경험을 가진 입장에서의 회개이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속에 드러난 것이었다. 성도는 잃은 경험이 있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요, 스스로 주님께 나아온 자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 주님께서 찾아서 불렀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온 자임을 아는 자이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우고 물어 가로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63-65).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어떻게 조롱당하며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을 반복적으로 예고하셨었다. 그 말씀대로 여기서도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을 지키는 자들이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누가 쳤는지 알아맞히어 보라고 놀려댄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권위에 대한 심각한 불신과 도전이다.

이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어떤 선지자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선지자에 대한 생각은 점쟁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 때린 자를 알아맞히어 보라고 희롱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과거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도록 보낸 선지자들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우하였고 또한 참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을 이렇게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날이 새어 백성의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공회로 모여 예수님을 정식으로 심판하고자 한다(67). 이런 점에서 누가는 유대교가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정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유대고 자체가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유대교가 그러하였다면 오늘날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의해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67-68절에서 우리는 성전 지도자들이 심문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볼 수 있다.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67-69).

 

성전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가 맞는지 대답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이 믿지 않으며 또한 예수님께서 묻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대답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단언하신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대답한다고 하여도 성전 지도자들은 믿지 않고 예수님이 물어도 그들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전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말에 대하여 답변을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여전히 자신의 권세로 자신이 스스로 증거하시겠다는 의도이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심판주이심을 드러낸다. 그런데 언제 그렇게 드러내시는가? “이제 후로는”, 즉 어두움의 권세를 끝내실 때이다. 지금은 잠깐 어두움의 권세가 세상을 지배할지라도 언젠가 그 권세를 예수님께서 끝내시고 친히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계실지라도 전혀 그들의 주도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독특한 하늘의 권세로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67), 하나님의 아들이심(70)을 산헤드린 공회에서 증거하고 계셨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사로잡고 계시다는 것은 이러한 당당함과 권세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성도란 세상을 향해 이런 권세로 복음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자들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