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73.누가복음 23:26-38 십자가에 못박히심

불편한 진리 2015. 1. 12. 12:48

 

73/

누가복음 23:26-38 

십자가에 못박히심

 

이제까지 누가의 글을 읽어온 독자라면 누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죄 없음에 대한 내용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힘을 빌려 합법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힘으로 빌라도를 위협하였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시거나 혹은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향하고 계셨다. 이제 예수님은 온갖 수치와 조롱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정점인 십자가에 처형되기 위하여 골고다로 향하게 된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26).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은 아마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던 중이었던 듯하다. 그러던 중에 처형장으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로마 병사의 요구에 따라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 본래 십자가형을 받는 죄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쇠약하셨으며 체력이 소진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저희란 누구인가? 누가는 이미 23:23-25에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무리들을 저희로 표현하였는데 26절에서 예수님을 끌고 가는 자들을 또 저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정황상 같은 인물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사형을 집행하는 자들은 로마의 병사들이다. 마가복음 15:16-20을 보면 군병들이라고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무리들과 같이 저희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장본인들을 저희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통해 누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자 하는 죄인들이라는 의미이다.

누가복음 18:31-33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방인들의 손에 넘기워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건의 전모는 성전의 지도자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가는 것도 아니고 빌라도의 의도대로 되어가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유대교의 권력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로마의 정치권력에 매여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어두움의 세력에 스스로를 내어맡기신 결과이기에 모든 것이 주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제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14:27). 이런 점에서 제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실 때에 참된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자신 백성들을 친히 부르시고 십자가를 지는 제자로 만드실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이란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확인한다는 차원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강제로 지워서 가게 한 것을 통해 십자가는 결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워진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예수님 주위에 많은 사람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백성과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7-28).

 

예수님은 울고 있는 여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부르신다. 스가랴 9:9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스라엘을 시온의 딸 혹은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부르면서 왕이 임하여 공의와 구원을 베푼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심판과 구원을 베푼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셨었다(21:23).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예루살렘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딸들이란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된 상태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을 위해 운다는 것은 자기 자녀를 지극히 사랑해야 하고 그 자녀가 앞으로 잘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자는 자녀들을 위해 우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 것이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29-31).

 

이 말씀의 의미는 단순히 아이를 잉태하지 못한 자, 나아가서 낳지 못한 자, 나아가서 젖으로 먹이지 못하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종말의 때에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잉태하지 못하여 아이가 없다는 것은 멸망과 진노를 피하기에 가벼운 몸의 상태라는 것이다. 아이를 출산한다는 것은 여자의 고유한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임할 때에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듯이 이 땅을 살면서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이 우리 자신을 얽어매지 않도록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으로 만족한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푸른 나무에 비해 마른 나무는 불이 잘 붙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빗대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과 이스라엘(예루살렘)을 비교하면서 설명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는 진노와 심판을 이루실 정도라면 예루살렘, 이스라엘,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진노와 심판은 어떠하겠느냐 그것은 당연히 더욱 심각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몰고 있는 자들이 유대인이나 로마 군병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32-34).

 

이사야 53:12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종 메시야에 대하여 이런 예언을 하고 있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사야 53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메시야라는 사실의 성경적 증거이다. 또한 범죄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상황(22:18)까지도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 현장의 상황은 철저히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다.

그 조롱은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란 쓴 패를 통해 절정에 이른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35-38).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였다. 로마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왕이란 말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라는 의미이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아주 작은 나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스스로 왕인척 하며 나서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조소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조소를 통해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전 세계에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선포를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되어 은혜로 내게 임한 결과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