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23.사무엘하 20:1-26 세바의 반란

불편한 진리 2014. 12. 12. 17:01

23(2013.7.7)

사무엘하 20:1-26

세바의 반란

 

압살롬의 반역이 제압되는 과정에서 다시 다윗에 대해 거부하는 조짐이 있었다. 본문 1절에 보면 1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1-2)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란의 이유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고 받을 유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바와 반역에 동참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깃과 유산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 행복하고 더 편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할당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왕으로 생각하며 어떤 지도체제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를 왕으로 세우든 그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줄 것이며 어떤 지도체제를 만들든 그것이 우리를 잘 살게 해주고 행복하게 하는 일에 얼마나 보탬이 되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쩌면 세바의 요구는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범죄 이후 자기를 위해 사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씀한다. 그 죄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싫어하고 언약을 거부하며 자기를 위해서만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윗은 세바의 세력을 두려워했다. 이스라엘의 12개 지파 중에 10개 지파를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키니까 상당히 위축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세바를 진압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측근이면서 골칫거리였던 요압도 제거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의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요압이 제거를 당하는 대신 자기가 세우려고 했던 사람 아마사가 제거를 당한다. 결국 요압은 군대장관으로서 견고히 서고 열왕기상 1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아도니야가 반역할 때 선봉에 선다. 다윗은 백성들 가운데 분열을 일으키는 장본인이었고, 아마사를 죽인 장본인이었고, 세바도 전혀 제압하지 못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고 드러내야 하는 역할에 실패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지 성경에서 확인해야 한다. 다윗은 실패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자기 언약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유다라는 혈육에 끌리는 다윗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사울과 같은 사람으로 압살롬이든 세바든 누구든지 인간의 방식과 힘으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언약을 거부하는 죄악임을 보여 주시며 또한 젊고 힘 있는 사람으로 왕이 바뀌면 자신들의 삶이 달라지고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여기는 백성들의 기대도 틀렸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다윗과 이스라엘 모두가 다 틀렸고 오직 하나님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원리만이 정당한 것임을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동원하신 사람이 이름 없는 여인이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고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세바를 잡으러 가는데 세바가 벧마아가 아벨성(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는 요새)에 들어가 있었다. 요압의 무리가 성을 통째로 함락시킬 준비를 한다. 그때 성중에서 어떤 무명의 여인이 요압을 만나기를 요청한다. 여인이 말하기를 저는 평화를 좋아하는, 충성스런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입니다. 장군께서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성 하나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성인 이 성을 왜 멸망시키려 하십니까?”(19/쉬운성경)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적이다. 이름도 모르는 여인과 다윗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불사하고 싸우는 요압 중에 누가 하나님을 위하고 누가 다윗을 위하고 누가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외형상으로 보면 당연히 요압일 것이다. 요압은 장수로서 나라를 위하여 수차례 전쟁을 치렀고 지금 이 순간도 반역자를 제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상황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 평생 몸 바쳐 충성한 요압 장군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서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여인과 요압이 대화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여인은 성 중에 있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설득하여 세바를 죽여 그 머리를 성문 밖으로 던져 반란이 진압되었다.

세바의 반란이 진압되는 일은 다윗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다윗은 어떻게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측근 세력이 있어야 하니까 골육지친을 가까이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마사를 심복 중의 심복으로 세우려고 계획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언제나 우리를 지배한다. 혈연, 학연, 지연이라고 하는 끈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놓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자기를 살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두려워하던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 사람은 요압이 아니고, 아마사도 아니며, 자기의 핏줄인 유다족속도 아니라 이름 없는 한 여인이었다. 하나님은 이 여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언약을 드러내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안에 있는 나라이다. 언약의 나라이기에 오직 하나님만 왕이시며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나라라는 것을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훌륭한 정치에 의해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고 주신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유지되는 나라다.

이름 없는 이 여인은 그것을 요압에게 말했고 그것은 곧 다윗에게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반란자를 잡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기업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작 본질을 놓치고 있는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잊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언약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관심을 놓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지혜로운 여인을 등장시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기업임을 강조하며 드러내셨다.

그런데 왜 이름 없는 지혜로운 여인을 하나님께서 내세우셨을까? 지혜롭다는 것은 머리가 영리하여 처신을 잘 한다거나 조리 있게 말을 잘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에서 지혜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곧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2:6, 9:10). 즉 이 여인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근거한 언약적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전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13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9:13-17)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이름 없는 존재로 오셨다. 유다 베들레헴 땅에 거할 곳이 없어 마구간에 오셨고 사람들이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여긴 나사렛을 통해 이 땅에 오셨다.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모습이다. 광야에서 마귀가 제안하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이름 없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 언약은 이름 없는 그곳에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의 이름을 두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름 없는 지혜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이름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4:12).

하나님 나라에는 지혜가 힘보다 낫다. 우매하게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낫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언약의 나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그분 안에서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세상의 힘을 거부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같이 이름 없이 살아가는 성도의 참 모습이다.

성경은 세바는 반란자로 징계하고 다윗은 성군으로 칭송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다윗의 실패, 모두의 실패를 보여 준다. 구약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죄가 얼마나 뿌리 깊으며 그 권세가 강력한가를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은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스라엘만큼 은혜 받은 민족이 어디 있으며 다윗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많이 체험한 자가 어디 있는가?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도 실패하고 다윗도 실패하는 장면을 보면서 죄가 얼마나 강한 것이며 인간이 죄를 스스로 이길 수 없는 존재이며 왜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지, 왜 하나님의 은혜가 동원되어야 하는지, 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