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21.사무엘하 18:1-33 압살롬의 죽음

불편한 진리 2014. 12. 9. 20:41

21(2013.6.16)

사무엘하 18:1-33

압살롬의 죽음

 

아히도벨이 고향으로 돌아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압살롬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압살롬은 용맹한 군인이자 탁월한 참모였던 충신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압살롬은 후새의 전략을 따라 군대를 소집하여 아마사를 총사령관으로 세우고 다윗을 추격하였다. 압살롬은 길르앗 땅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압살롬의 군대가 그러는 동안 다윗 왕은 이방인들의 도움으로 식량을 구비하였고 군대를 조직하고 지휘관을 세운다. 다윗은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아비새에게 각각 한 부대를 맡겼고 또 가드 사람 잇대에게 한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2절에 보면 군대를 정비하여 다윗 왕도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말했을 때 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3)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으면서 모든 백성들이 다 들리게 압살롬은 죽이지 말 것을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압살롬의 군사와 전쟁을 하였는데 그 결과는 다윗 왕의 승리로 끝났고 이때 죽은 자가 2만 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신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언약 백성들에게 붙여주신 전쟁이다. 여기서도 8절에 보면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라고 말씀하였다. 즉 칼에 의한 승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해서 수풀에 죽은 자가 많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칼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고 그것은 결국 칼이라고 하는 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승리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전쟁이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기게 하셨지만 사실 다윗이 이겨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다윗이 승리해야 한다는 근거를 다윗 왕에게서 찾을 수 있는가? 압살롬이 반역을 했으니 압살롬이 악했고 다윗은 선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는가? 성경은 결코 그런 것을 말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압살롬이든 다윗이든 하나님 앞에 다 악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신 것은 아직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압살롬을 제압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선하고 착하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고 언약의 왕으로 세우신 것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보여 주실 뜻이 더 있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근거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경쟁에서 내가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 그분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존재이지 나의 열심을 동원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상황 안내판에 살고 죽는 것은 안전띠에 달려있습니다라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고 실제 살고 죽는 것은 안전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 살고자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죽고자 한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살게 하고자 하신다면 어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살게 될 것이고 죽게 하고자 하신다면 우리가 어떤 노력을 다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는 것이다.

물론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으니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살고 죽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으니 안전벨트를 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되 여건과 환경들을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한 조건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세상에서 잘되고 행복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을 갖추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잘못된 신앙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군사들을 전쟁에 보내면서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명령했지만 요압은 나무에 걸린 압살롬을 비참하게 죽인다. 그리고 아히마아스와 구스 사람에 의해 전해진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다윗이 듣는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슬퍼하였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33). 이러한 다윗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사무엘하 12:25에 보면 다윗의 범죄에 대한 나단의 책망이 있은 후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이를 하나님이 치시니 그 아이가 심히 앓게 된 내용이 있다. 그때 다윗은 아이를 위해서 금식하며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자 모든 신하들은 다윗이 더욱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이의 죽음을 알리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정작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윗은 오히려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반응은 단순히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아버지의 슬픔으로 볼 수는 없다. 압살롬의 반역과 그의 죽음에는 다윗의 죄가 들어 있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대신하여 자신이 죽었어야 마땅하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자식을 사랑하는 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알고 있기에 그 죄를 압살롬의 죽음 속에서 보고 있었다. 다윗은 왕으로서 그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죄로 인해 자신이 죽는 것보다 자식이 죽는 것은 더 큰 슬픔이고 고통이다. 자식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로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압살롬의 죽음 속에서 자신의 죄를 보며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임을 새삼 느끼고 깨달은 상태에서 나온 죄에 대한 애통이고 슬픔이다.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을 치심으로 다윗에게 다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고 계시며 이 일을 통해 다윗을 다시 회복시켜주셔서 비록 다윗이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아직 언약의 왕에 대한 계시를 압살롬이 아닌 다윗을 통해 계속 나타내실 것임을 보이신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 때문에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에서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임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죄를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구원을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만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먼저 발견하게 하시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게 만드신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