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18.사무엘하 15:1-37 압살롬의 반역

불편한 진리 2014. 12. 1. 17:14

18(2013.5.12)

사무엘하 15:1-37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이 형 암논을 죽이고 도망하여 그술에 있을 때에 요압이 드고아 여인을 동원하여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압살롬은 암논이 자기 누이 다말을 범했기에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암논을 죽였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살인자로서 죽어야 마땅한데 정작 자신은 그술에 도망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향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여겨야 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렇게 생각하기보다 왕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분개한다. 이처럼 죄인은 은혜를 기억할 줄 모르고 받은 사랑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른다.

이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자신을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50명을 세워놓고 성문 곁에 서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을 한다. 재판을 받기 위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는 사람이 올 때에 그 사람들을 붙잡고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3)라고 하였고 그리고는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4)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다(6).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을 하겠다고 꿈꾸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압살롬의 생각에 다윗은 왕의 위치와 신분을 상실하여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압살롬이 말한 억울한 송사를 들을 사람을 다윗 왕이 세우지 않았다는 말은 백성들의 억울함이 제대로 해소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다윗이 왕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압살롬이 만들어낸 말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그 말에 공감하고 압살롬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백성들에게 다윗 왕의 역할이 이런 부분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점일 것이다.

당시에 다윗이 모든 일들을 선하고 의롭고 공평하게 처리하고 있었다면 백성들은 도리어 다윗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고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의 원리대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식대로 공평하게 다스리고 있다고 칭송하면서 압살롬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도리어 압살롬의 행동을 거부하고 막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압살롬이 반역을 행하였다는 것은 이미 다윗이 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사무엘하 14:25에 의하면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라고 하였다. 압살롬의 흠 없는 아름다움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환언하자면 백성들의 마음에 압살롬의 아름다움이 자기들의 힘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울을 왕으로 세웠던 그 마음이 다시 드러나고 있었다. 세상에서는 인간적으로 좋아 보이는 모든 조건들을 힘으로 삼고자 한다. 압살롬은 이런 힘을 자신에게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누구의 것인가? 이스라엘이 누구의 나라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언약을 주시며 선언하신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언약의 하나님 소유이다. 그러기 때문에 압살롬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를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압살롬의 반역은 단지 왕이 되기 위한 야망의 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훔쳐 하나님을 이겨보려는 마음이다. 이는 곧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왕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압살롬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방인들의 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왕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 주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다. 그런데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중재자가 아니라 백성들의 통치자요 지배자라고 생각하였기에 누구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만 하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반역을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한 것을 보면 힘으로 왕의 자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였다.

이러한 일로 보건대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 이미 왕의 위치와 기능, 그 역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압살롬이 자기 힘으로 그 위치를 점유하려고 한 생각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왜곡되었고 변질되어 이해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아니 하나님은 여전히 언약적 차원에서 늘 말씀하시고 이끌고 가고 계시지만 죄인들은 항상 자기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자기 방식으로 생각해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압살롬은 4년이 지난 후 다윗 왕에게 가서 그술에 있을 때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서원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헤브론에 가서 행하겠다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각 지파들에게 정탐을 보내어 나팔 소리가 울리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라고 외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함께 할 군사 200명을 준비하였고 다윗의 책사였던 아히도벨도 끌어들인다.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어떤 자가 다윗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황급히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 한 가지는 다윗이 왜 도망을 가야 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전체적인 정황상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굳이 도망을 가야할 필요 없이 오히려 압살롬을 진압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18절에 의하면 다윗이 도망갈 때 왕으로 행진한 사람만도 600명이나 되었다. 압살롬의 반역에 맞서 전쟁을 치루었다면 다윗이 숫자적으로도 우세하였고 전쟁의 경험상으로도 우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한 소식을 듣는 순간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14)라고 반응하였다. 다윗은 왜 급히 도망하려고 했을까?

이렇게 반응한 것에는 사독과 아비아달이 레위인들과 함께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르려고 할 때에 그들에게 25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25-26)라고 하였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다윗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들고 나와서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인정한 말이다.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의 곳으로 당겨오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에게 끌어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도록 고백한다. 우리는 신앙을 나의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모셔오고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내게로 하나님의 뜻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집어넣어야 한다. 내게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에 끌려가야 하는 것이 신앙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왕으로 세움을 받아 이제까지 그것을 배운 것이었다.

압살롬을 힘으로 제압한다면 그것은 힘에 대하여 힘을 가지고 맞서는 세상 나라와 똑 같은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힘의 원리와 방식에 의해 움직이고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다. 언약의 나라요 제사장 나라이며 왕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언약의 왕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 주는 나라요 왕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방식과 원리대로 압살롬을 제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곧 압살롬의 나라이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언약궤를 버리고 예루살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맡긴 것이었고 언약의 방식대로 한 것이었다.

다윗의 도망은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자신의 실패를 절실히 체감하며 다시금 언약의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하는 왕의 역할을 감당하려는 고뇌의 결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겉으로 보자면 도망가는 것이 패배자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수동적인 모습인 것 같지만 압살롬의 행위를 하나님의 일하심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께서 만약 선히 여기신다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여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굴복된 모습이다.

참된 언약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마귀에게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다 내어주시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것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권세까지도 다 취하시는 방식이었다. 죄인들은 힘의 원리와 방식으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자기 언약을 고수하심으로 대속의 죽음을 고수하셨다. 그 방식이 바로 사람들에게 죽임당하는 십자가라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 방식이 바로 압살롬의 방식이었고 죄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들의 방식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스스로 내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성취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이 원하셨던 언약의 방식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방식과 원리대로 이루신 그 십자가 덕분에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바로 우리들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십자가의 방식과 원리를 좇아 사는 자들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