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19.사무엘하 16:1-23 도피 중의 다윗

불편한 진리 2014. 12. 1. 17:16

19(2013.6.2)

사무엘하 16:1-23

도피 중의 다윗

 

다윗 왕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 중에 있을 때에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므비보셋의 종 시바이며 또 다른 한 사람은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이 두 사람은 사울의 집안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 시므이라는 사람은 다윗 왕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1절에 보면 시바가 다윗을 맞으러 나온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2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1-2).

그러자 음식을 가득 실은 나귀를 몰고 나온 시바에게 다윗이 므비보셋의 안부를 물었다.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3). 시바의 말은 므비보셋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울의 나라는 그 아들 요나단의 나라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요나단의 나라는 아들인 나(므비보셋)의 나라가 되는 것이 옳다는 뜻의 말이다.

그리고 다윗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사울의 집 족속 중에서 게라의 아들 시므이를 만난다. 시므이는 다윗 왕을 노골적으로 저주하는 언사를 되풀이 하였다. 그는 다윗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사울 왕조의 왕권을 빼앗은 자로서 백성들의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자기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반역을 당하고 있다고 저주하였다. 시므이의 욕설을 듣고 있던 다윗 왕의 신복인 아비새가 그를 죽이겠다고 할 때에 다윗은 말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10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10-12).

그 사이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아히도벨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그러자 아히도벨이 이렇게 말한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21).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다.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은 다윗이 도피하는 위급한 상황이다. 다윗은 단지 도피하는 중에 종 하나를 만났을 뿐이고 그가 주는 나귀와 양식을 받았을 뿐이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사소한 일을 성경이 왜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사소한 것은 없다. 우리가 보기에 사소한 작은 일로 여겨지는 것이지 모든 일에 언약을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이기에 사소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바의 일과 연관하여 시므이의 저주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여 이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나타내고자 하시는 언약적 의미는 무엇인가?

나중에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 시바의 이 말은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사무엘하 19:24 이하를 보면 시바가 거짓 고발을 다윗에게 하였다고 므비보셋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므비보셋은 다윗이 떠난 후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았으며 옷도 빨지 않고 기다렸다고 말한다. 이는 다윗을 향한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결국 시바는 거짓으로 므비보셋을 참소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바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을 모두 시바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바의 말만 듣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말한 다윗의 실수임이 분명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실수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왕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내신 것이다.

시바는 다윗이 처한 어려운 형편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4)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다윗을 통해 므비보셋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돌리는 것이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시바에게는 이스라엘의 왕이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어떤 뜻을 드러내느냐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과거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켜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이 관심사는 아니었다. 어쩌면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지 않았다면 므비보셋의 재산은 다 자신의 것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억울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냐민 집안의 시므이는 여전히 사울의 집안이 왕권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다윗의 왕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윗을 그토록 저주했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을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혈통에 매여서 베냐민 집안이 왕권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다윗을 저주하는 용감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압살롬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면 왕권이 모든 백성들 앞에서 인정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생각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압살롬과 압살롬 주변의 인물들이 가진 생각이었고 대부분의 백성들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언약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 다윗이 예루살렘을 고스란히 내어주며 도피를 하였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당장 압살롬을 제압하지 않았고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왕으로 세우셨고 왜 지금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지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자신이 왕으로 세움을 입는 것과 왕에서 물러나는 것은 다윗 자신의 능력과 결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순순히 물러났고 시므이의 저주에 대하여 보복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 전혀 왕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기어코 왕이 되게 하셨다. 그렇다면 반대로 다윗 자신이 왕위를 아무리 부여잡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왕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인위적으로 왕권을 부여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질 뿐이다.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압살롬이 후궁들을 취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무엘하 12:10-12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삼하 12:10-12)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다윗이 잘못했으니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다.

이것이 언약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실상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이 없고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 욕심과 힘으로 왕권을 쟁취하려는 모습이 이러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죄인의 한계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언약의 왕이란 세상의 힘을 가지고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기들의 힘으로 왕을 세우고 그 세상적 힘에 의해 왕권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압살롬을 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을 왕으로 계속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적절하게 순응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상의 다양한 힘의 변화에 대하여 대처해야 하고 그 힘의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죄인들의 생각이다. 죄 아래 있는 존재는 언제나 이렇게 세상의 변화를 따라 움직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진정한 언약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다. 그분이 동일하시다는 것은 죄인들이 변화에 민감하고 변화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은 늘 변한다는 것을 고발하시는 말씀이다. 어쩌면 그래서 다윗이라는 한 왕에 대하여 싫증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힘에 의해 새로운 왕, 그것이 죄인들이 원하는 왕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변함없이 동일하신 분이다. 그분이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이루신 구원에 대해서도 안심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이루신 구원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함없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변화에 흔들임 없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간다는 의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