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강(2013.5.5)
사무엘하 14:1-33
압살롬의 귀환
다윗을 비롯한 성경의 여러 등장인물들을 높이는 것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요 세상의 원리이다. 세상은 위인 만들기를 좋아한다.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인물이라고 인식되기 위해서는 태어나는 것에서부터 그의 삶이 범상치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위인전을 보면 그의 삶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고 대중들보다는 훨씬 출중한 모습으로 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위대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들도 이런 시각으로 본문을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사무엘서 말씀을 나누기 위하여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공개된 많은 설교들 대부분이 다윗을 높이고 훌륭한 인물로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치명적인 몇 부분의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신실하게 살았던 자였다고 강조하면서 믿음의 훌륭한 모델이라고 설교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제가 보는 관점은 다윗은 훌륭한 인물이 아니고 그도 하나님 앞에 죄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왜 다윗의 못난 점들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다윗을 무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인됨, 실패, 못남, 부족함 이런 것들이 말씀 속에서 확인될 때에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이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강조하려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모세가 아니며 다윗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것을 언약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인간의 죄인됨과 못남, 부족함을 내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대로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난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뿐만 아니라 성경의 어떤 인물의 삶 가운데서 아름답고 신실하고 성숙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만나주시고 말씀을 주셔서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세상의 위인전에는 어떤 한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사람의 결점들을 감추지만 성경은 오히려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하 14장 본문도 다윗을 아주 초라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드는 장면이다. 다윗과 요압, 압살롬의 실상을 낱낱이 다 공개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성경의 기록 의도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성경 본문을 대하면서 사람의 성품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어떻게 드러내고 계시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다윗 왕은 자신의 이복 자식들 사이에서 일어난 강간사건과 살인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한층 더 깊이 깨닫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에게 아직도 끊어버릴 수 없는 것은 혈육에 대한 정이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런 엄청난 사건들에 대한 충격도 서서히 둔감해졌기에 압살롬에 대한 애정이 더 간절해졌다(삼하 13:37-39).
요압은 다윗 왕의 의중을 알고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는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어 한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왔다. 요압은 그 여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렇게 하면 왕이 즉답을 피함으로써 신중히 반응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압은 여인에게 상복을 입히고 슬픔에 빠진 상주로 변장시켜 왕에게 자기의 형편을 말하도록 하였다.
드고아 여인은 다윗 왕에게 자기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아들이 둘이 있는데 사이가 좋지 않아 어느 날 싸웠고 아무도 말리는 자가 없어서 형이 동생을 쳐 죽였으며 그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동생을 죽인 살인자를 그냥 두어선 안 되고 율법대로 형을 죽이겠다고 요구하니 왕께서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만약 동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큰 아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결국 집안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을 들은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요구대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들을 동네 사람들이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보호해 주겠다고 대답을 한다. 바로 그때 여인이 하는 말이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 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13절)라고 하였다. 즉 비록 죄가 있더라도 압살롬을 방치하지 말고 이제 그가 돌아와서 회복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다윗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 왕이 죄인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드고아 여인은 압살롬을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땅에 쏟아진 물과도 같아서 누구도 그것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빼앗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쫓긴 사람이라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십니다”(14절 / 쉬운성경)라고 말하였다. 드고아 여인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을 드러내주고 있다.
성경은 드고아 여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요압이 세운 계획이라는 것이 결국 다 드러나지만 하나님은 드고아 여인을 통해 자신의 일하심을 나타내고 계신다. 드고아 여인은 다윗이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드러내고 언약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로 세움을 입은 자는 다윗이었다. 압살롬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으로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사람이 다윗이었다. 그러나 다윗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드고아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계셨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14절). 이 말은 다윗이 이스라엘 중에 나타내었어야 하는 말이다. 다윗 역시 죄인으로서 그가 행한 대로 다 갚으신다면 죽어야 마땅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은 언약 안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라고 세우신 것이었다는 것을 다윗이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름없는 드고아 여인을 여기에 개입시키신 것은 드고아 여인과 같은 상태가 바로 현재 다윗이 처한 상황이고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이 드고아 여인과 같은 상태에서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치시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드고아 여인이 굳이 등장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요압의 계획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셔서) 드고아 여인을 등장시키셔서 드고아 여인이 처한 상태가 곧 다윗이 처한 상태임을 다윗에게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고자 하신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것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과 은혜,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 인간의 혈육에 의한 정을 끊고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굴복된 상태로 언약을 이스라엘에 드러내어야 하는 것을 위해 드고아 여인을 통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도록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언약의 성취자가 존재하신다. 죄인들이 죽어야 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적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고 그 죽음의 자리에 세우신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모든 것이 요압의 계략인지 알았으나 드고아 여인에게 약속한 것 때문에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압살롬을 만나지는 않는다(24절).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한다는 것은 위치적 이동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덮어주며 허물을 감싸 안아주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하였지만 압살롬을 만나지 않음으로 왕의 자존심과 체면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였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25절)라는 말씀과 또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27절)라는 이 말씀을 왜 기록하고 있을까? 하나님은 드고아 여인을 통해 다윗을 부끄럽게 만드시고 하나님 자신의 언약의 말씀을 드러내셨으나 압살롬은 세상에서 잘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이 사건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외형적인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흠모하고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언약을 대적하는 힘으로 만들어진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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