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32.출애굽기 32:1-35 금송아지

불편한 진리 2014. 9. 22. 19:58

32

출애굽기 32:1-35

금송아지


1. 출애굽기 32:1-14


출애굽기 31:18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고 했다. 왜 성막에 대한 지시사항은 기록하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는가? 앞으로 이 돌판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보아서 알 수 있다. 즉 돌판이 깨어지고 다시 시내산 위에서 만들어지며 최종적으로 그 돌판이 증거궤 안에 보관되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출애굽기 32-34장의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1).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4)라고 했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절기로 선포하면서(5)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놀았다고 했다(6).

하나님께서 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성막이란 하나님 자신이 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며 그들을 다스리는 안식의 상태, 즉 천국의 모습으로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여호와의 보좌에 금송아지 형상을 놓았고 여호와의 절기인 유월절의 자리에는 금송아지 형상을 만든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언약과 같은 방식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복을 기대했었다.

모든 것이 바뀐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것이 다 여호와께서 모세언약으로 주신 형식을 그대로 다 취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모세언약의 형태와 방법을 그대로 다 취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보좌에 여호와께서 왕으로 좌정하셔서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가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피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 희생의 피의 자리에 다른 것으로 채워서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백성들은 우리를 위하여”(1)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했고, 하나님도 모세에게 자기를 위하여”(8)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희생의 피를 오늘날 교회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전부 인간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주님의 백성이요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와 피를 주술적으로 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믿음으로 싸우는 역할을 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결국 자기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이 다 우상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3:5). 자기를 위한 예수는 성경에 없는 예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한다.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청한다.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앞세우고(13) 중보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14).

이것은 모세의 기도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32:34의 말씀대로 심판이 연기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단지 시일이 연기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을 자와 심판을 받지 않을 자로 구분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모세 언약이 깨어졌으므로 모두가 멸망을 받아야 하나 하나님의 자비가 멸망을 받아야 할 그 자리에 다른 형태로 자리하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멸망의 자리에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오는 자는 살지만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자는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2. 출애굽기 32:15-35


모세는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이것을 보고는 황급히 돌판을 깨뜨리게 된다(19). 왜 돌판을 깨뜨렸을까? 적어도 모세가 알고 있기로는 자신이 들고 내려오는 돌판은 앞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될 성막의 가장 깊숙한 여호와의 보좌에 놓여지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산에서 내려와 보니 그 자리에 금송아지 신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모세언약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모세는 급히 돌판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깨뜨리지 않는다면 모세언약에 순종하겠다고 대답한 이스라엘을 모세언약에 의해 철저히 다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세언약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금송아지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는 멸망이었다.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의 참된 모습은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유월절 희생의 피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기대하고 피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언약의 틀에다가 자기를 위한 것들로 대체시켰다. 하나님은 인간이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해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함께 하시는 장소는 지성소 안의 증거궤 속에 있는 돌판, 즉 모세언약 속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멋대로 가시화하여 복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들이 드리는 제사도 결국은 언약과 상관없이 먹고 마시고 뛰어 노는 종교적 행위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오늘날 한국 교회가 종교놀이를 하는 것과 동일한 모습이다.

돌판이 깨졌다고 해서 모세언약이 무효화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계속 언약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세는 여호와 편에 있는 자를 부르니 레위자손이 다 나왔고(26),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편에 있지 아니한 자를 치게 했다(27). 이때 삼천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다(28).

그런데 모세는 이것을 여호와께 헌신한 것이라고 말하며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29). 즉 여호와의 편에 선 자들이 언약 파기자들을 치는 것이 헌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복은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모세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자들이 누구이고 멸망 받을 자들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사는 자이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을 자와 그렇지 않는 자들이 동시에 이스라엘 속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 속에서 다시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 즉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을 구별해 내시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