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33.출애굽기 33:1-23 모세의 중보

불편한 진리 2014. 9. 22. 20:01

33

출애굽기 33:1-23

모세의 중보


1. 출애굽기 33:1-6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1)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생명의 하나님이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진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이다(3,5).

여기서 네 백성이란 32:732:34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언약을 어긴 백성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백성들이지만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언약만큼은 하나님의 사자를 앞서 보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까지 인도하심으로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즉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중보자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면서 한 그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고 했다(4). 창세기 34:1-4에서 야곱이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고 벧엘로 올라가는 회개가 있었음을 비추어 볼 때에 여기 단장품을 제거했다는 것은 회개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신구는 우상 숭배의 의미가 있었고 곧 그것들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므로 단장품을 제거한다는 것은 우상 숭배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한번만으로 끝나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되어져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단장품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신다(5).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매일 매일의 회개 그것은 성도에게서 저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출애굽기 33:7-11


1절에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라고 했다. 여기서 갑자가 회막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성경학자는 모세가 편집의 실수로 이곳에 이 본문을 삽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얼토당토않게 주어지는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1-6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자신의 사자를 보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다. 사자를 보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형식이 성막을 통해 거하시는 방식이다. 그러나 아직 성막은 건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진 밖에 장막을 쳐서 회막이라고 이름을 붙임으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성막에 거하셔서 이스라엘과 만나시되 죄인들과는 분리되어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즉 성막이 건립될 때까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만날 수 있는 중간 거점으로 회막을 마련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막을 이미 회막이라고 말씀하셨다(27:21; 28:43; 29:42-44).


3. 출애굽기 33:12-23


회막에서 모세는 백성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간구하게 된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12,13). 이것이 모세의 간구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버리셨음을 모세는 알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실 것이라면 그 언약 때문에 모세 자신을 세우셨고, 시내 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모세 자신에게 은총을 베푸셨다면 그대로 모세의 백성에게도 은총을 베풀 수 있는 하나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해서 만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이 모세의 백성들에게도 모세를 통해서 모세와 동일한 은혜를 베푸셔서 모세의 백성이 백성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14)고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변덕쟁이신가? 하나님이 친히 가실 것이면 애초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왜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고 또 친히 가신다고 말씀하신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모세의 중보적인 역할을 하는 것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은 도무지 우상을 섬기는 애굽적 심성을 가진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실 수밖에 없는데 언약을 이루는 방식은 죄인들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자리(영역)를 마련하심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서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대표로 세워 그의 목숨을 담보로(32:33,34)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 언약이 들어 있는 이스라엘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존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언약 안으로 부르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은 나 한 개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적 관심은 중보자에게 있었다.

욥이 의인이라는 말은, 친구들의 오해로 인해 가중되는 고통 속에서 그의 관심은 오직 중보자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중보자)도 없구나”(9:33)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다음과 같이 나타내셨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59:16-19).

하나님은 언약의 대표자, 중보자인 모세에게 은혜를 베푼 기준에 의해 모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19).

여호와란 자신의 뜻대로 주권적으로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이 증거로 모세를 어떻게 보호하시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보이셨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지날 때에 모세를 반 틈에 두고 손으로 덮었다가 거두시는 것이다. 그럴 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즉 모세도 한 인간으로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도 살아날 수 있는 것과 같은 은혜와 긍휼을 하나님께서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그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긍휼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십자가 은혜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와 불신자가 살고 있다고 해서 동일한 삶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