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14.사도행전 9:1-19 핍박받는 예수

불편한 진리 2014. 9. 20. 17:36

14

핍박받는 예수

사도행전 9:1-19


우리는 교회를 말할 때 자주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성경적 원리에 의해서 지금 한국 교회에서 생각하고, 행해지고 있는 것이 주님의 몸과 그 몸의 정신에 맞는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이야기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교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누구나 다 교회 개혁에 대한 고민과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교회 개혁에 대한 논의들의 대부분은 참신한 교회상에 대한 이상과 비전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논의가 나오게 된 배경들을 보면 거의가 다 자신이 기존의 교회에서 당한 억울함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성경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를 옹호한다고 해서 다 주를 위해 사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교회를 비판한다고 해서 다 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가 관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맞는 것인가 하는 문제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분의 소유로서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단성 여부는 그 교회가 어떤 것을 믿고 주장하느냐 하는 문제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믿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 그분이 지신 십자가, 거기서 흘린 피가 오직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으로 믿고 주장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를 믿고 교회만을 이야기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 교회는 주님의 몸과 동일시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8:3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데 대하여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4). 사울이 핍박한 대상은 그냥 헛된 것을 믿고 추구하는 종교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관점에서 이단적인 종교 모임을 해체시키려고 다메섹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단적인 모임을 해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전에 자신을 비롯한 유대교의 신봉자들이 죽인 그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을 가로막고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5).

사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난처한 상황이었고 황당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조했고 뿐만 아니라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주도해 왔는데 그것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혼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이단적인 종교 모임을 없애려고 하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10:3). 이것이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종교적 믿음과 열심이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에 대한 막연한 열심과 충성심이 주님을 공격하고 주님을 괴롭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사울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께서 아니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2). 그냥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울이 환상으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각본은 다 짜였고 주님이 친히 이 일을 주도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옛날에 가졌던 여전한 생각으로 사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13-14). 결국 아니니아라고 하는 사람도 주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주님을 성가시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5-16)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될 일도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니니아가 책임져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언약하신 대로 부지런히 자기 백성들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비록 사울과 같이 이렇게 주님에 대한 대단한 핍박자라 할지라도 복음 앞에 굴복시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한 대적자에 대하여 힘없이 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뜻이 있다면 그 사람을 불러서 자신의 증인이 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모든 인간들이 다 주님의 대적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주님의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늘 방해자가 되고 있고 원수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십자가의 정신과는 반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런 자를 주님께서 성령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주님의 일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주님께서 친히 하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설쳐야 주님의 일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왜 별의별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하고 갖가지 전도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합니까? 왜 많은 일거리들을 만들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일급 장애인 내지는 식물인간과 같이 만들어서 한쪽 구석에 고이 모셔두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로 인해 주님은 핍박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알아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바로 나의,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나는 종이기에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자신의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울에게는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부르셨기 때문에 사울이 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우리는 넘겨짚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성경의 의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로서 한 일이 큰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울과 같은 핍박자를 복음 앞에 굴복시키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일이 큰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증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집사 직분 주지 않는다고 교회 일 못하겠다는 소리가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장로, 권사로 세움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보기에 창피해서 교회에 안 나오겠다는 말이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라고 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저주 속에 있는 자입니다.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교회를 얼마나 개혁했는가 하는 것을 주님은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를 먼저 생각하다 보니 주님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조용히 교회를 떠나시면 됩니다. 그리고 언제가 주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때에 교회에 나오시면 됩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자신 있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21:15-17). 자기 자신을 믿을 자로 내세우는 것은 늘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주님의 소관입니다. 주께서 쓰실 때에 다만 우리는 무익한 종”(17:10)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쓰신다면 쓰시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히 여길 뿐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들을 믿을게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분의 일하심에 맡겨진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을 대적하지 않고 주님 말씀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게 되었다면 무조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