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11.사도행전 6:8-15 스데반

불편한 진리 2014. 9. 20. 17:33

11

스데반

사도행전 6:8-15


교인들의 신앙은 크게 둘로 양분됩니다. 성숙한 자와 성숙하지 못한 자로 말입니다. 그 기준은 아주 유치한 것에 있습니다. 예컨대 주일성수, 철저한 십일조 생활, 기도 혹은 전도 생활, 교회나 혹은 목사 개인에게 얼마나 충성하는가 하는 이런 것들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성숙하지 못한 신자로 말해지고, 성숙하지 못한 자란 곧 믿음이 약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직분도 잘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직분을 주는 기준도 외적인 기준에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되는 인물들을 보면 그러한 외적인 모습을 가지고 성숙한 신앙으로 평가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 성숙한 신자라는 그런 식의 의미를 성경에서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런 표현 자체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두 가지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도 좀 나은 신자가 있는가 하면 조금 못한 신자가 있다는 식의 발상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적이고 진화론적 이론에 불과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쨌든 한 사람이라도 교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성숙한 신자로 만들기 위하여 갖가지 프로그램들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들을 이수하기만 하면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그것 때문에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인간이 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것들이라면 다 추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잡동사니가 모음집이 되었습니다. 성경공부도 하나의 프로그램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성경공부 하는 자체를 신앙생활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 즉 삶의 일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공부도 삶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한 부분 즉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교회 봉사 이런 것만 가지고 성숙한 신앙이다 아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다는 대목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았을 뿐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자신의 복음을 위해 바울 사도를 도구로 쓰셨을 뿐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이는 일부분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에 대해 전부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분을 보면 나머지도 알 수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직 주님의 판단에 맡길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스데반에 대해서도 보면 그가 결코 성숙한 성도였다고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5).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교회 생활을 잘했다든지 그가 주일성수를 철저히 했다든지 십일조를 잘 냈다는 그런 부분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보는 기준으로 본다면 도무지 그가 성숙한 성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여기에 왜 뽑혀 나왔습니까? 그가 교회에서 뽑혀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게 된 이유는 6:1 이하에 있는 대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반목과 갈등 때문에 사도들이 자신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겠다고 해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는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서 일곱 사람들을 세워 구제를 공평하게 하도록 했다는 식으로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5절에 기록된 일곱 사람은 구제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구제를 공평하게 하거나 교회의 재정출납을 전담했다고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 일곱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 일로 인해 이렇게 교회가 본질적인 말씀 전파의 임무로 확고하게 세워지니까 제사장의 무리까지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즉 교회가 본질적이고 근본적으로 해야 할 일로 재정립하게 되니까 말씀에 복종하게 되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데반을 비롯하여 교회에 세움 받은 여섯 사람들이 사도들과 역할 분담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본래 해야 할 일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해야 하는 일도 구제하는 일을 열심히 관리하거나 재정을 맡아서 관리하는 그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8절에 와서 느닷없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나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공회에 잡힙니다. 공회는 거짓 증인들을 세워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하는 말을 하고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데반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공회 앞에서 말씀을 강론하게 됩니다. 그것이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강론입니다.

그 강론의 내용을 우리가 여기서 다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마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구약에서도 우리 조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의인들이 고난을 당했고, 결국 오늘날에도 말씀이 아닌 다른 것, 즉 외적인 종교형식에 관심이 빼앗기다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살인자가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15). 즉 어떤 악의를 가지거나 자기 자신의 어떤 이기심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회에서 이 말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분노하였습니다.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죽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 과거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18:31)라고 한 말은 거짓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라는 로마 권력의 손을 빌어 합법적으로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자기들의 눈에 거슬리고 하나님을 모독한다 싶으면 언제든지 율법에 근거해서 마음대로 살인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구약의 연장선에 있는 자들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이 의인들을 무참하게 죽였던 것과 같이 의인 스데반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 받고 죽임당하는 것을 기뻐했듯이 스데반은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이 가셨던 길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를 지적했던 유대인들로부터 날아오는 돌을 막아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충만 그것은 고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생애는 비참하게 돌에 맞아죽는 생으로 마감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죽느냐 죽음의 형태로 말하지 마십시오. 참 신실한 성도가 비참하게 죽어야 하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참한 것으로 따지자면 예수님만큼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날아오는 돌을 막아주고 고난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 편의 설교 때문에 죽게 만드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스데반의 생애는 실로 죽음으로 가고 있는 생애였습니다. 얼마 전 TV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기 위해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주행시험을 본다고 하는 60세가 넘은 할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한글을 배우며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노인들이 심심치 않게 방영되고 있습니다. 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꿈을 이 사회에 도전정신으로 주겠다는 것이 방송사의 의도일 것입니다. 젊은이들도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에게는 그런 꿈도 없었습니다. 그냥 성령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셨던 그 고난과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성령께서 장악하고 있는 자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5:41에도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고난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주장하신다는 의미는, 성령께서 고난의 길로 주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길에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부하거나 반항하거나 좌절할 권리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도리어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죄성 때문에 나오는 치욕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대한 반항이나 좌절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겨버립시다.

고난과 죽음이 눈앞에 임박해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충만한 자는, 십자가를 믿는 자는 세상의 죄를 들추어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이 되심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두려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죽인다는 위협 자체가 우리를 위축되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나 또한 죽어 가는 것을 아는 자는 영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단순하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 믿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숙한 성도로 오늘보다 내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되기를 원하면서 온갖 교회의 외적인 일에 매달리기를 좋아하는 교인이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를 원하십니다. 온갖 종교적인 행위나 경건의 모습으로 치장하려고 하지 마시고 지금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어가고 있는 솔직한 모습으로 주님을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