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종교와 신앙
사도행전 10:1-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요구보다 나의 요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직 그 사람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과 종교란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봅니다. 해도 별 관계없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취미 생활과 같은 정도로 취급합니다. 신앙을 막연히 자기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해 절간을 찾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종교를 가집니다. 그러니 인간 종교의 본질은 모두 다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는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생명으로 말씀합니다. 생명입니다. 취미 생활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문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을 주장하시는 분의 소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주님에 의해 주장되어져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 말씀을 대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보자기 안에는 율법의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각종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라고 하였습니다(13절). 그러나 베드로는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언제든지 먹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이 환상에 대하여 고민할 때에 가이사랴에서 고넬료가 보내온 자들이 당도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보여준 환상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본문의 내용 역시 우리도 환상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일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베드로가 없으면 주님의 일이 안되기 때문에 여기 이쯤에서 베드로를 환상으로 설득시켜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일하실까? 기왕이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서 헷갈리게 하지 말고 직접 나타나셔서 다 말씀하시고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시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조금은 복잡하게 일하십니다.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고넬료로 하여금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서 모셔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먹으라고 하시는 음식을 베드로가 거부한 것은 막연한 자기 고집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베드로에게는 항변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철저히 구분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것은 만져서도 안 되고 먹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따라 음식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생각한 것처럼 부정한 것과 정한 것에 대한 개념은 율법을 가지고 구분할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이란, 단순히 더럽다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정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내 쪽에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 편에서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그 기준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예수님으로 정하셨습니다.
기준이 새롭게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주어진 율법 속에 이미 언약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다 드러날 것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보여 주신 것만 아니라 고넬료에게 보여 주신 것으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고넬료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기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4절)고 했습니다. 그래서 욥바의 베드로 사도를 청하여 말씀을 듣도록 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도 오해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이 본문은 그런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기도와 구제 그런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를 불러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복음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차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에게 이것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유대인 대 이방인’의 개념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이냐 밖이냐 하는 것으로 구분될 뿐입니다. 이것을 죄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복잡하게 일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만을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아니면 주님의 일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이웃에게 희생의 모습을 보여줄 줄 아는 자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24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가 자신이 잘되고 편안하게 하는 방향으로만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읽으라고 요구하시는 것도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도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자기 신념이고 자기 종교일 뿐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각, 행동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늘 주님을 공격하고 성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한다고 할 때도 될 수 있으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찾기보다는 다른 것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둡니다.
이를테면 환상이나 입신(흔히 천국에 갔다 오는 체험이라고들 함) 같은 신비한 체험, 또는 병 고침을 받는 기적 등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또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도란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 자체에 기쁨과 만족을 두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이란 죽은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은 살아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그 과정을 생각하시고 거기에 의미를 둔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일의 결과로 인한 영광이 누구에게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그것은 종교입니다. 취미 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종교에서 신앙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생활이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정도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다스림 속에서 살아지는 삶을 말합니다. 살아지는 삶이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역시 날마다, 매 순간순간마다 자기 자신이 죄인으로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있는 현장을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요구하는 종교에서 주님의 요구를 생각할 줄 아는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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