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13.사도행전 8:26-40 주의 영에 이끌림

불편한 진리 2014. 9. 20. 17:35

13

주의 영에 이끌림

사도행전 8:26-40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2:1-5).

성경은 언제나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공격하면서 복음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세상과는 반대적인 상황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통해서도 주님을 볼 수 없고, 가능성이 있고 꿈이 있는 자기 자신만 보이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에서 지적하는 인간의 죄성이 어떤 것으로 드러나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여기 야고보의 말씀에서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는 전혀 반대되는 나라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즉 성경에서 인간의 죄로 지적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주님의 십자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엄청난 교인수의 부흥이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실로 야고보서에서 인간의 죄로 지적하고 있는 말씀 그대로의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큰 교회가 대접받고,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은 목회자를 능력 있는 목회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기에 다 동의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기독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놓고 십년, 이십 년을 목회하더라도 복음 그 순수함을 놓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전하려고 발버둥치는 목회자나 또한 그런 교회를 만족하면서 예수님만 믿는 성도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외적으로 폼나는 교회를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신앙의 초점은 늘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우리의 신앙, 혹은 기독교가 왜 이렇게 열심이 없는가, 뜨거움이 없이 냉랭한가 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기도 합니다. 평범하게 사는 것에 대해 못견뎌하듯이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해도 좀 열정적으로 하고, 기도를 해도 좀 뜨겁고 화끈하게 해야 한다는 등의 생각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습니다. 좀 두드러진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온 교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교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이것이 많은 신자들에게 고민거리요 숙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흉내 내는 법만 배웠습니다. 전도흉내, 기도흉내, 예배흉내, 심지어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조차도 흉내만 내었지 정작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되는 빌립이라는 사람은 결코 외적으로 무엇을 이룬다는 차원으로 주님의 일에 부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그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이나 계획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핍박이 심해졌기에 쫓겨서 사마리아로 내려와 있다가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믿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거기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26절에 의하면 난데없이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떤 곳인가 하면 그 길은 광야라고 했습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27)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가사로 가는 광야의 노정까지 전적으로 주의 성령에 이끌려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계획은 필요 없다. 우리도 빌립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아 전도하자!’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성령께서 빌립을 붙잡으니 빌립이 꼼짝없이 주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게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계획이나 경험, 지식이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획도 잡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계획이 필요하다면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자기가 계획한대로 되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시하고 일하시는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계획이 전혀 주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전제에서 세워지는 계획이어야 합니다.

빌립의 입장에서 볼 때에 사마리아 전도는 큰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께서 빌립을 광야의 길로 몰아내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빌립의 전도는 사마리아에서 받는 대접, 나타낸 능력, 명성 이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코 그 다음 사역에 연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경력이 붙어서 그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전도는 경력도 아니고 내게 축적되는 방법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주도하심에 의해 믿음으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전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제 더 넓은 지역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해서 좀더 큰 개척교회를 하자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광야로 보내시는 주님의 명령은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사역은 주님께서 빌립을 도구로 붙잡으시고 쓰시는 주님의 사역입니다.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행해진 전도 그것은 주의 영에 의해 주도된 일입니다. 앞의 사역과 뒤의 사역은 단절된 사역이었습니다. 앞의 전도행사가 경험이 되어 그 다음의 전도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원이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초월적인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영생을 지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루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날마다의 새로움이기 때문에 지루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늘 새롭습니다.

이 땅에서는 새로운 것이 있을 수가 없지만 하나님 나라는 늘 새로운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은 과거의 어떤 일이 경험으로 쌓여서 그것이 도움이 되고 그것의 연장으로 더 나아지고 더 발전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39). 서로 갈 길을 갔습니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습니다. 이 사람은 에디오피아의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니까 이 사람 붙잡고 개척 교회하면 쉽게 성공할 수 있겠구나 내지는 에디오피아에 따라가면 궁궐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 역시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해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늘 함께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빌립과 함께 큰 교회를 한 번 해 보려고 제안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 전함! 그리고 결별이었습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을 때에 그는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읽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35). 사지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을 묘사한 그 내용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대속의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오직 예수님만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만을 전하는 빌립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빌립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십자가의 주님과 같이 오직 주의 영에 의해 끌려갈 뿐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전도경험, 축적된 힘, 완벽한 플랜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전하는 그 내용과 같이 예수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자가 예수 믿는 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 나오면 특별하게 대우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장로를 뽑을 때 될 수 있으면 돈이 많은 사람을 세우려고 합니다. 외모를 보니까 교회에 도움이 되고 쓸 만하기 때문에 이용하고자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의 영에 이끌림을 받는 신자,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모습으로 주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해서, 물질이 없기 때문에, 교인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것이 토대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큰일은 주님 자신이 친히 하십니다.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바르게 가르치고 증거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