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12.사도행전 8:1-25 사마리아

불편한 진리 2014. 9. 20. 17:34

12

사마리아

사도행전 8:1-25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의 일에 별로 만족이 안 됩니다. 모든 면에서 여러모로 불만이 있습니다. 탤런트들 중에서도 자기의 신체에 대해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TV의 한 프로그램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 한 부분이라도 반드시 자기 신체에 대해 불만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활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정에 대하여, 직장에 대하여, 그리고 정부에 대하여 불만이 있지만 거저 참고 살아갈 뿐입니다. 불만이 있다는 것은 자신을 아직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크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높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과는 반대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길을 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우리의 불평, 불만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불평과 불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자리, 이런 환경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자신의 선택과 지혜에 의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어떤 분에게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의 선택과 그분의 결정에 의해 움직여질 뿐입니다. 그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여기 주님께 붙잡힌바 되어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는 빌립이라는 사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어떻게 붙잡혀 있습니까?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예수라고 하는 자를 우습게 보았습니다. 급기야는 예루살렘 교회를 공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으로 인하여 환란, 핍박이 온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스데반만큼 골치 아픈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고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평온하게 신앙생활 잘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평지풍파를 일으킨 스데반을 질타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데반의 일로 인간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면서 인간들의 죄를 지적하는 스데반을 죽인 자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도 철저히 응징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알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신자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빌립은 6장에서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구제에 대한 갈등 때문에 뽑혀진 사람입니다. 어쩌면 빌립이라는 사람도 예루살렘에 가만히 머물러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5절에 보니까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거기서 복음을 전한 이유는 한 마디로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4). 그 중의 한 사람이 빌립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17). 이 본문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결코 그런 의미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까지 이르러 전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주도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아직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타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0장의 고넬료 사건에서 베드로의 태도를 보면 그가 이방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 민족에게만 주어진 복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다고 하니 의아해 했습니다. 이방인과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하고 또한 그들 역시 복음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심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특이하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는 주의 성령께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전파는 철저히 그분이 주도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고 하셨습니다. 이는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로만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홀로 친히 이루시는 천지창조 때에 하신 말씀과 같은 주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그리고 온 유대에 복음이 증거되게 하셨습니다. 지금 복음이 유대라는 민족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도록 일하신 것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증거하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는 분 역시 예수님 그 분이십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주님의 일입니다. 증거하시고, 성령주시며,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일까지 주님이 친히 다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에 우리는 부름 받았을 뿐입니다. 전면에 나서서 설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일하게 하실 때에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불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이 자리로 몰아 넣으셨고 그분이 일하게 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지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그냥 높은 자리에서 구경만 하시고 실제적인 일은 교회나 노회, 혹은 교단, 선교단체를 운영하는 인간들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그의 영 안에서 계속해서 직접 일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욕심에 의한 열정과 힘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복음을 누구에게도 일임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죄인들을 불러 증인으로 사용하실 뿐입니다.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빌립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빌립의 전도를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시몬은 그것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돈으로 사유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류광수씨를 중심으로 해서 다락방 전도훈련을 받은 기존의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이 뭉쳐서 또 하나의 교단을 세웠습니다. 본래 속해 있던 교단에서는 하도 이단이라고 떠들어대니까 견디지 못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하나의 교단을 만들어서 다락방 전도의 방법을 마음껏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술사 시몬이 행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도 방법이라는 마술적인 힘으로 사람을 모아서 이전에 백만 원으로 하던 것을 이제는 천만 원으로 교회 사업하자는 심보입니다.

전도에 방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전도 방법이 있고, 바울의 전도방법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류광수씨의 전도 방법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도 자체가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니까 많은 사람을 예배당으로 끌고 나올 수 있더라는 식의 인간적인 전도방법의 추가는 주님의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사람의 전도 방법이 효과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교단을 만들고 다락방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우리는 빌립의 전도를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자신의 권위로 일하시는 그 권위에, 그 일하심에 순종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바치는 것이지 우리의 기능, 재능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남을 죽여서라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세상에서는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최대한으로 드러내고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자기를 내세우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란 자신을 죽여서 주님을 증거하고자 하는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본 적도 없고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그런 방식으로 주님은 자신의 복음을 증거 해 나가십니다. 이것을 믿고 그분의 일하심에 맡겨진 자가 성도요 그리스도인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