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18.여호수아 20:1-9 도피성

불편한 진리 2014. 9. 5. 19:28

여호수아 20:1-9

도피성


2,3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고 했다. 7,8절에 보면 납달리 산지의 갈릴리 게데스,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 르우벤 땅의 베셀, 갓 지파의 땅에서 길르앗라못, 므낫세 땅의 바산 골란 이렇게 여섯 곳으로 정해진다.

도피성이란 살인을 한 사람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피하는 성을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살인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살인을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성이다. 그런데 도피성에 대해서는 민수기 35:6-34, 신명기 19:1-13에서 이미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다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의 땅을 지파별로 다 분배한 후에 다시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상기시킴으로 약속의 땅이란 의미를 분명하게 규정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민수기 35장에 의하면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불의의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가 이 성으로 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죽은 자의 친족이 보복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내려진 조치이다. 피의 보수자란 죽은 자의 억울함을 복수할 자라는 뜻이다. 이들은 죽은 자의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 그들의 복수로부터 살인자를 보호하는 것이 도피성이라는 것이다.

6절에 보면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재판을 통해서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음이 판명되면 그 도피성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사느냐하면 도피성에 거하고 있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이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유의 몸이 된 그에게 옛 죄에 대해서 복수하거나 책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피성 제도를 이스라엘 안에 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유의 몸이 되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누구 덕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실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 형제가 그에 의해 죽었다는 것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찾을 것이다.

만약 도피성이 없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 의해서 살인에 대한 대가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한 살인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죽어야 할 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피성에 거하고 있던 대제사장이 죽으면 살인자는 더 이상 도피성에 매일 필요 없이 자유의 몸이 된다. 자유의 몸이 된 이상 피해자의 친족들도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은혜 안에 살기를 원하셨다. 그들의 자유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자유였음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장자 재앙에서 죽어야 할 자들이었지만 문설주에 바로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고 도피성을 세우신 것이다. 도피성을 볼 때마다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를 항상 상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도피성의 의미를 상기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도피성의 의미와 정신이 이스라엘 안에 확산되어야 했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 도피성의 원칙에 세워진 정신이어야 했던 것이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결국 인간의 만남 속에서 발생되어지는 여러 가지 실수와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원칙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편에서는 무수히 많은 장들에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91:2 / 참고 14:6, 46:1, 61:3, 142,5 ). 이런 점들을 통해서 볼 때에 도피성이란 단순히 땅에 만들어 놓은 피난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피난처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도피성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다. 속죄로 말미암아 영생이 이르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도피성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주안에서 산다는 것은 도피성에 거한다는 것과 같다. 도피성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없는 자로서 자유 함을 얻은 것이다. 자유 함을 얻었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의 은혜와 긍휼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 그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도피성을 두시고 그 도피성에는 대제사장을 두셨다. 그리고 도피성에 피한 살인자는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곧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서 자유를 얻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그도 도피성이라는 제도에 매여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성도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제도 자체와 원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제도 자체와 원리를 혼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무수히 많다. 예컨대, 이번에 장로교 합동측 총회에서는 이제부터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통해 총회장을 선출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 정의를 실천하는 곳에서는 구약에서 희년 제도를 시행했기 때문에 땅 값을 올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부동산 투기 등을 막으려면 희년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나타난 행사나 제도 자체를 행하면 성경적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은 철저히 마귀적인 발상이다.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천사가 그 발을 받쳐줄 것이라고 했다. 실로 마귀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 적용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문자 속에 담으신 것은 문자를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 그분이 십자가를 통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질병을 치유하고 세상에서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으로 구약의 상황을 그대로 대입시켜서 적용하고 있다. 도피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도피성의 정신이 확산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도피성을 자의로 더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명제 아래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입니다. 탐욕이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보면서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내 교회를 확장시키고자하는 탐욕이고, 내 교단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탐욕이며 나아가서는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이다. 그 탐욕이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옷을 입은 채 사람들을 착각에 빠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분이시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보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인원수를 통한 세력 확장이 아니라 주님께만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성도를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약속의 땅은 어린 양의 희생정신이 퍼져 있는 나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에 희생하신 주님의 마음이 퍼져있는 나라이다. 주님의 마음이란 낮아진 마음이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마음이며(2:6-8),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마음이다(15:3). 바로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마음이 퍼져 있는 나라이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