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15.여호수아 15:1-63 유다의 땅

불편한 진리 2014. 9. 5. 19:18

여호수아 15:1-63

유다의 땅


오늘 공부할 본문을 보면 상당히 길게 지명을 나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지명들을 일일이 찾아서 확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명들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암호를 풀이하는 책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얼마 전에 바이블 코드라는 책이 출판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책은 히브리어를 가로로 혹은 세로로 조합하여 오늘날에 일어날 예언을 찾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성경을 주술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꼭 이런 식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오늘날 얼마든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 소위 말하는 Q.T를 한답시고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찾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잘못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무작정 좇는 현상까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주술용으로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도 어떤 신비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해석되어온 언약의 바탕 위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성경이 지명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언약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14장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가? 어떤 정신으로 사는 자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간다고 했는가? 레위인, 제사장과 같은 사고방식, 즉 땅이 없기 때문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희생만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언약 정신이다. 그러한 언약 정신을 가지고 땅을 분배하는 일을 이해하고 있었던 자가 바로 갈렙이라는 자였다. 갈렙이 산지를 달라는 것은 만용도 아니었고 허세도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약속하신 땅을 믿음으로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정신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정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앞 장에서 살펴보았었다.

본 장은 이러한 언약 정신의 원리가 땅의 분배에 있어서 그대로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분배 기록에서 유다와 요셉을 전면에 내세워 놓았고 이들에 대한 기록이 17장까지 세 장을 차지하고 있는 볼 수 있다. 그리고 18,19장 두 장을 나머지 일곱 지파의 분배를 다루고 있다. 이것을 보아서 유다와 요셉 지파가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유다와 요셉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유다와 요셉이 계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다는 그의 아버지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려고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다 희생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의 희생은 하나님의 희생을 뜻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희생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들 두 사람은 야곱에게 복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야곱은 그들을 축복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은 이들 두 사람이 담고 있는 계시를 깨달아 함께 복을 누리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본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땅의 분배에 대한 기록은 바로 이러한 원칙을 반영하고 있다. 유다와 요셉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유다와 요셉이 담고 있는 계시를 따르라는 뜻에서이다. 요셉 지파 중에서는 동생인 에브라임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에브라임을 16장에, 므낫세를 17장에서 취급한 것도 에브라임이 계시를 담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손을 어긋나게 하여 축복한 것을 통해 드러났듯이 작은 자가 큰 자가 된다는 계시를 에브라임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결국은 이스라엘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에브라임을 앞세웠다. 이와 같이 땅의 분배에서는 철저하게 언약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13절 이하에 보면 갈렙이 딸을 옷니엘에게 시집 보내는 내용이 나온다. 16절에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준다고 약속을 한다. 그러자 옷니엘이 기럇 세벨을 쳐서 취하고 약속대로 악사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런데 18,19절에 의하면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악사가 갈렙에게 요구한 것이다.

시집간 악사가 갈렙을 찾아온다. 그리고 나귀에서 내릴 때 갈렙이 악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라고 묻는다. 아마 악사가 나귀에서 내린 것은 뭔가 자신에게 요구할 것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어쨌든 악사는 갈렙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물음에 대해서 아버지가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니 샘물을 주소서라고 요구한다. 왜 악사는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했는가?

우리가 보기에 샘물은 하찮은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요구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악사는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관심이었던 것이다. 남방 땅이란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이다.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이라면 물은 필수적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 물은 생명과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악사는 많은 땅이나 다른 조건보다 물을 확보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악사는 자신이 살 지역에서는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악사의 요구에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악사에게 준다. 윗샘과 아랫샘은 높은 지역에 있는 샘과 낮은 지역에 있는 샘을 말한다. 즉 높은 지역의 땅이든 낮은 지역의 땅이든 물로 인해서 어려움이 없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악사가 갈렙에게 물을 요구한 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악사는 자신이 살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았다. 메마르고 건조한 땅이기 때문에 그 땅에 필요한 것은 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물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옷니엘이 악사를 얻은 사건이나 그것을 통해 샘을 요구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언약 정신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옷니엘이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에서도 잘 증거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3:8-11). 즉 무엇이 생명인지를 아는 자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고 또한 계속된 생명의 상태로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땅의 분배에 대한 성경 말씀은 오래 전에 야곱이 그 아들들에게 축복했던 원리, 즉 언약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이삭의 가정에 계시되었던 것이고 또한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던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죽었고, 이삭도 죽었고, 야곱도 죽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이렇게 언약 안에서 부지런히 열심히 일해 오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늘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계속하여 신실하게 지켜 오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나누어 받는 것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터전으로 하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알고 이것을 믿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을 땅을 나누는 것으로써 보여주셨던 것이다. 결국 복의 원리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낮아지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 은혜를 아는 것이 복이고 이것이 언약 정신이었다.

이스라엘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언약이 성취될 수 있었다. 오늘날도 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에 의존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본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사람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목사가 주인 노릇하고 있고, 장로나 권사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큰소리치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주님의 몸 된 교회라면 하나님의 언약 정신, 즉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자 하는 정신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진실로 언약 정신으로 살고 있는 자가 교회에서 대접받고 있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