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17.여호수아 18:1-19:51 일곱 지파의 땅

불편한 진리 2014. 9. 5. 19:25

여호수아 18:1-19:51

일곱 지파의 땅


여호수아 18:1, 2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음이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얻지 못한 자가 오히려 일곱 지파라고 말씀하고 있다. 18, 19장은 이제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서 세 사람씩을 뽑아 땅을 측량하여 오게 했다. 그리고 제비뽑아 그 땅을 나누어주었다.

17장에서 보았을 때에 요셉 자손은 땅이 좁다는 불평을 통해 좀더 좋은 땅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의 제안에 대하여 거절한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다. 약속의 땅이란 요셉 자손이나 혹은 다른 지파들이 자기들이 마음대로 원하고 지정해서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요셉 자손은 당장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만 가지고 불평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요구에 불만족한 상태로 약속의 땅을 바라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입장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요셉 자손의 불만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앙 경험을 자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과거에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신앙적 열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자랑한다. 오늘날 사실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빼면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온통 자신의 신앙적 경험에 의해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나 그 은혜를 자신 안에서 키워 오늘날의 신앙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내세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은연중에 우리는 십자가 경험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십자가 죽어본 경험이 있느냐?’ 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어본 경험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당했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십자가를 어떻게 경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그러한 것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 경험이 없었거나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철저히 우리 자신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경험은 반드시 그리고 철저히 현실이고 또한 현실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고 현실적이라는 말은 반드시 어떤 이들이 간증하는 것처럼 그렇게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허공에 뜬 신앙처럼 날마다 공허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경험을 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세우는 차원이 아니라 말씀이 성도를 다스리고 있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의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셨던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의 경험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고린도후서 2:14-16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향기란 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냄새는 그 실체에게서 피어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게 되어 있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서는 사망의 냄새가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이 거하시는 성도에게서는 십자가에 날마다 죽고자 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경험이라고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것은 경험이 아니라 죽은 나무를 살려서 그 나무에 열매를 달아 놓으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성령의 열매가 공개되게 되는 것이다. 그 열매를 죽었던 나무였던 우리라고 하는 가지 끝에 매달아 놓으실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십자가 경험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날마다 죽이시는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죄성으로 통회하면서도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고 주님의 은혜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된 자이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요셉 자손과 달리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산지가 골짜기이며 철병거가 있다는 현실이 결코 두려운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히 가능하게 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싸워 얻은 땅이라야만이 자신이 노력하고 힘을 들여 철병거를 이길 수 있었다든지 아니면 골짜기를 일구어 많은 소출을 얻게 되었다든지 하는 고백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은혜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노력해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은혜로 볼 줄 아는 인간을 원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그것을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음”(1)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땅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실로에 회막을 세우는 것과 연관시켜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회막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그 땅에 이미 살고 계시면서 그 땅을 점령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만나를 줍듯이 그 땅을 취하여 살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아직 땅이 분배되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도 땅을 분배하여 이러한 정신으로 살도록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일곱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에 성막이 세워진 실로에서 제비뽑게 되는 것이다.

18:1-10에서는 먼저 일곱 지파의 땅의 분배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18:11-19:48에서는 일곱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내용으로 그리고 19:49-51에서 여호수아에 대한 언급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땅을 분배받지 못한 지파를 위해 분배가 의식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곱 지역이 측량에 의해 나누어졌고 그것을 제비뽑아 나누게 되었다.

베냐민 지파는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의 지역으로 결정되었다(18:11-28). 시므온은 완전히 유다 경계 내에 위치하게 되었다(19:1-9). 때문에 나중에는 유다로 흡수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창세기 49:7 말씀을 보면 시므온과 레위가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라고 한 말씀대로 상속권이 박탈되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단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스불론, 잇사갈, 납달리)은 요셉 자손의 땅 북쪽으로 갈릴리 호수 너머까지 배치되었다(19:10-39). 그리고 단 지파는 남쪽에 배치되었다(19:40-48). 그러나 단 지파는 자기들의 땅에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19:47에 보면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후에 단 지파는 북으로 이동하여 이스라엘 북쪽 납달리와 므낫세 사이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50절에서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에게 성읍이 제공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성경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안식이란 땅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이다. 제비뽑아 땅을 나누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선택에 의해 살게 되는 것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만을 좇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에서 부동산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여기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